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90년대 초반, 대림산업과 유공(현 SK주식회사)이 양분하던 국내 석유화학 시장에 복수의 대림그룹 계열사들이 신규 진입했을 때였다.
대림산업 석유화학 사업을 담당했던 경영진들은 수암(修巖) 이재준 대림그룹 창업자에게 이들 업체의 참여로 경쟁이 더욱 심화될 것이며, 다음 연도 사업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고 보고했다.
“일제 강점기때 애오개에 인력거 회사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회사가 없어진 거다. 망한 거지. 그 당시 서울 시내에 인력거 회사라고는 그거 하나밖에 없었는데 왜 망했을까? 경쟁이 없었다는 거야. 경쟁이 없으니까 자멸한 거지.”
수암은 한가지 예를 더 들었다. “동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을 보라. 많은 의류업체가 밀집해 있다. 치열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건 당연하지. 그런데 경쟁이 심해서 문 닫는 업체는 별로 없어. 오히려 잘된다고 난리야. 비결은 한 군데에 몰려 있으면서 서로 경쟁한다는 것이다.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키운 거야. 시골구석에 업체가 달랑 하나 있다고 보자. 경쟁력이 있을까? 얼마 못 갈 거다. 핵심은 경쟁이다. 경쟁이 있어야 기업이 잘된다는 말이다.”
수암은 경쟁이 치열하다고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더 없는 기회라고 믿었다. 치열한 경쟁환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기업들은 더욱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겠지만, 경쟁이 두려워 회피하는 기업은 도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할 뿐이라는 것이다.
경영진이 수암의 말이 옳다는 걸 확인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림산업 석유화학 사업부는 경쟁업체의 등장으로, 체질개선과 함께 프로정신을 강조하는 기업문화로 혁신을 거듭하며 지금까지 대한민국 석유화학 산업을 이끌고 있다.
1917년에 태어난 이재준 회장은 1939년 민족자본으로 부림상회를 설립, 목재와 건자재를 취급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광복 후 사명을 대림산업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종합건설업체로서 면모를 갖춘 대림은 건설업 호황기를 맞아 급성장했다.
한국 최초로 태국, 베트남 등 해외 건설공사에 진출하고 경부고속도로 및 청계천 복개공사 등 굵직한 사업들을 진행하며 1960년대 들어 국내 제1위 건설 회사로 부상했다.
이후 1968년 대림요업주식회사, 1974년 대림엔지니어링, 1994년 대림코퍼레이션 등을 설립하고, 1977년 대림공업주식회사(현 대림자동차주식회사), 1979년 호남에틸렌주식회사 등을 인수해 대기업 집단으로서 면모를 갖췄다.
건설 외길을 걸으며 담담히 내실경영을 꾸려온 수암은 평소 “풍년 곡식은 모자라도 흉년 곡식은 남는다”며 절약을 강조하곤 했다. 또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아침 7시30분이면 어김없이 출근하는 등 대림의 사훈인 ‘근면’‘성실’을 평생에 걸쳐 실천했던 기업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