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人100言]박인천 “절대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2016-01-1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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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끌어낸 기업인들의 ‘이 한마디’ (12)

금호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자[사진=금호아시아나그룹 제공]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정직, 근면, 성실만이 살길이다. 기업을 맡은 사람은 직장에 대해 근면하고 성실하며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특히 고객과의 약속과 믿음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

금호(錦湖)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자가 기업가로서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말이다.
29세 늦은 나이에 독학으로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해 공직자로서의 삶을 살던 그는 1945년 해방에 앞서 자리에서 물러나 제2의 삶을 준비했다. 바로 기업가였다.

1946년 택시 2대를 갖고 운수업에 투신할때 그의 나이는 46세. 당시 마흔이 넘으면 노인 취급을 받거나, 일을 놓고 유유자적하던 시절이지만 그는 과감히 도전을 택했다. 교통사업에 뛰어든 이유로 금호는 “당시 교통이 아주 불편했는데, 도대체 광주에 택시라는 것이 한대도 없었다”고 말했다.

금호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가족이나 어린 자식들까지도 일본말 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금호와 평생을 함께한 이순정 여사는 “회장님(금호)께서는 애기들에게 절대 일본말도 못쓰게 하시고 게다(일본 나막신)도 안신겼다. 애국심이 강했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겠다는 신념이 투철했던 금호가 오랜 관직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배경은 국가경제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됐음을 보여준다.

광복후 피폐한 경제상황과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금호는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극복하고 반세기만에 육상 및 항공운송·타이어·건설·레저, 교육문화 사업을 아우르는 오늘날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일궈냈다.

금호는 기업인으로서 삶에 충실하기 위해 다른 어떤 길에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금호는 “나한테 정치활동하는 게 어떻겠냐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기업하는 사람은 기업하고, 정치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야지. 만일 기업하는 사람이 정치에 생각을 둘 것 같으면 기업이라는 것이 안되거든. 그래서 거기다 전력하는 게 결국 발전에 이바지가 될 것이라 생각해 정치에 투신을 안했다”고 말했다.

이런 금호가 집착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지역개발이었다. 기업이란 개인이 이룩한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토양을 바탕으로 뿌리내린 것이라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1954년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직에 선임된 금호. 이후 25년간 회장을 역임한 그는 지역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육로 수송업자였던 금호는 특히 철도 개선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호남선 복선화, 호남 본선의 광주역 직결, 호남선 열차의 특급열차의 증설·증편 문제 등을 해결했다. 공인으로 선공후사(先公後私, 사보다 공을 앞세움)의 자세를 실천한 그는 광주를 비롯한 전라남도 지역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금호는 항상 불가능해 보이는 미개척 분야에 도전했다. 물론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일생은 ‘집념’이란 한 단어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또 그는 늘 “정직, 근면, 성실만이 살길”이라고 강조했다.

인간에 대한 도리와 신의를 앞세운 금호는 경쟁업체의 사장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관용을 실천했다. 자신이 인수한 기업의 사장이 빚더미에 올라앉자, 그를위해 집을 마련해준 일화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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