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숨을 걸자. 실패하면 우리 모두 사무소에서 똑바로 걸어나와 우향후 한 다음, 동해바다에 몸을 던지는 거다. 절대 실패할 수는 없다.”
종합제철소 건설에 임한 청암(靑岩) 박태준 포스코 설립자는 이를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쟁’으로 정하고, 임직원에게 ‘우향우 정신’을 강조했다.
제철소 부지가 포항으로 결정돼 250만평 부지를 매입했다. 주민을 철거시킨 뒤 부지조성 공사가 시작됐지만 제철소 공사자금 1억 달러를 구할 길은 요원했다.
한국 제철소 건설을 위해 1966년 4개국 7개 철강업체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은 한국에서 제철산업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자금지원을 해줄 수 없다는 최종 입장을 내놨다.
10년간 추진해온 철강독립의 꿈이 좌절되는 순간, 청암은 포철까지 실패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 휩싸였다.
이런 성황에서 떠올린 한줄기 희망의 아이디어가 대일 청구권자금이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1970년 4월1일 포항종합제철소 착공식을 진행했다. 이어 1973년 6월9일 드디어 제1용광로에서 쇳물이 쏟아졌다.
청암의 ‘우향후 정신’은 대일 청구권 자금지원이 결정되면서 ‘제철보국(製鐵報國)’ 과 맞물려 포스코의 전통과 정신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그는 임직원에게 “포철은 조상의 핏값으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고 우리 농민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걸고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아니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청암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제철소 건설에 매달렸다.
‘조상의 핏값’을 소중하게 생각한 그는 정치적 외풍, 사리사욕을 배제하고 오직 나라의 부를 쌓는 데에만 전념했다. 그 결과 포스코는 설립 25년만인 1993년 10월2일 연간 2100만t 철강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19세기 후반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끈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가 35년만에 연간 1000만 t 생산 기록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청암은 ‘한국의 철강왕’‘한국의 카네기’로 불린다.
중국 최고 실력자인 덩샤오핑은 1978년 8월 일본 신일본제철 본사를 방문,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철 회장에게 포스코와 같은 철강업체를 건설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단박에 거절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제철소 건설을 반대했던 국제금융기구 관계자도 포스코의 성공과 관련, “지금도 한국에서 제철소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면서 “한국에 박태준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청암은 그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