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김영삼 정부가 급격하게 추진한 세계화는 오히려 1997년 11월 IMF 경제위기를 초래했다. 고(故) 김 전 대통령이 재임하던 1997년에 한보철강, 삼미그룹, 기아자동차 등이 연이어 부도가 났다. 또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 결국 그해 11월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하는 처지가 됐다.
경제개혁에도 불구하고, 6차례나 경제 장관을 바꾸는 등 일관성없는 개혁과 무리한 시장개방 정책으로 경제계에 부담을 줬다는 평가다.
여기에 직격탄을 맞은 곳이 대우그룹이다. 당시 세계경영을 앞세워 과도한 확장투자에 나선 김우중 전 회장의 대우그룹은 IMF를 맞아 그룹 해체라는 아픔을 맛보게 된 분기점이 됐다.
일각에서는 김 전 회장이 세계경영을 외친 이면에 문민정권과 갈등이라는 배경이 깔렸다는 분석도 있다. 대선 출마설로 고(故) 김 전 대통령의 눈밖에 난 김 전 회장이 해외진출로 살길을 마련하려했다는 설명이다.
이 회장은 곧바로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승용차 사업 진출 승인을 받아 밀월관계를 맺었다는 소문까지 났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의 갈등도 있었다. 삼성의 승용차 사업진출승인으로 밀월관계를 유지했지만, 이 회장이 중국을 방문중이던 1995년 4월 “우리나라는 행정력은 3류급, 정치력은 4류급, 기업 경쟁력은 2류급”이라고 한 발언이 청와대에 흘러들어가 4개월간 모든 추진 사업이 중단될 정도로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
이후 고(故) 김 전 대통령은 방미 수행 기업인 명단에서 이 회장을 빼버렸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각 정부 부처에 삼성 관련 사업을 전면 보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같은 해 8월 삼성전자의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투자에 대한 해외투자 승인을 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 회장이 고(故) 김 전 대통령을 만나 사과한 이후에야 제자리를 찾았다.
고(故) 최종현 선경 회장도 전경련 회장을 연임하며 ‘재벌개혁’ 기치를 세웠던 고(故) 김 전 대통령과 마찰을 겪었다. 고(故) 김 전 대통령이 “대기업은 선단식 경영으로 중소기업의 입지를 좁히지 말라”고 말하자 “경제력 집중 억제는 세계화에 어긋난다. 문어발이니, 업종 전문화니 하는 말은 에디슨이 전구 만들 때나 하는 얘기다. 문어발을 하든 말든 규제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라며 반박했다.
당시 선경은 최 전 회장의 발언 이후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세무조사와,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받았다.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도 고(故) 김 전 대통령과 매끄럽지 못한 관계였다. 1992년 대선 당시 정 명예회장이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다.
고(故) 정 명예회장은 대선 패배 직후인 1993년 비자금 조성 혐의 등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불법 선거운동 혐의 등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던 정 전 명예회장은 1995년 8월 경제 살리기 명분으로 사면 복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