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배상희 기자 =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우중(79) 전 대우그룹 회장의 관계는 '이상동몽(異床同夢)' 쯤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정(政)과 경(經)이라는 다른 자리에서 대권, 세계, 월드컵 등 같은 꿈을 꾸었다. 두 사람이 품은 꿈은 매우 닮아있었지만 종착지가 달랐던 탓에 때로는 악연(惡緣)으로, 때로는 선연(善緣)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각각 '세계화'와 '세계경영'을 부르짖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변화와 개혁을 시도한다.
김 전 회장이 세계경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 또한 이맘때다. 1993년 당시 내수에만 치중했던 다른 기업과 달리 대우그룹은 "세계경영, 대우가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TV 광고를 통해 세계경영의 시작을 알렸다.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앞세워 모든 역량을 해외 시장으로 집중했다. 그 결과 1998년 말 대우그룹은 396곳의 해외 현지법인, 21만9000명의 해외임직원, 41개의 국내계열사, 10만5000명의 국내임직원을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같은 대우그룹의 세계경영 전략은 김 전 대통령의 세계화 구상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대우기업의 해외진출 행보를 좇아 국내 여러 기업이 세계 각국에 공장과 법인을 세우게 됐고, 이는 기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활성화시키고 한국을 세계로 알리는 기점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세계화'와 '세계경영' 모토는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김 전 대통령의 섣부른 세계화 추진은 위기관리 부재를 낳았고,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촉발하게 된다. 이를 통해 '개혁의 기수'로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경제무능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세계경영을 앞세워 과도한 확장 투자에 나섰던 대우그룹 또한 IMF를 맞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고, 이는 대마(大馬) 중의 대마인 대우그룹 시대의 종식을 앞당기는 분기점이 됐다.
아울러 두 사람 모두 대권의 꿈을 품었었다. 김 전 회장은 문민시대의 출범을 알린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계획하고 있었고, 이는 두 사람 간 갈등의 시발점이 된다.
일각에서는 김 전 회장이 세계경영을 외친 이면에는 문민정권과의 갈등이라는 배경이 깔려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선 출마설로 김 전 대통령의 눈 밖에 난 대우그룹이 국내에서 더 이상 제대로 된 투자를 하기 어려워지자, 일찍부터 해외에서 비즈니스 기회를 많아 봐온 김 회장이 해외진출로 살길을 마련하려 했다는 설명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문민정부 기간 이뤄낸 스포츠 분야 최대 업적인 '2002년 월드컵'과도 맞물려 있다.
스포츠 매니아로 알려진 김 전 대통령은 대선 출마 당시 월드컵 유치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결국 집권기간 동안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이뤄냈다.
김 전 회장 또한 대우그룹 총수시절 계열사 간 축구대회에서 매번 선수로 뛸 정도로 축구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진다. 프로축구가 출범한 1983년 대우로얄즈를 만들고, 학교 내 축구단을 만들어 인재 육성에 나서는 등 축구에 관한 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았던 김 전 회장은 1990년 6월 2002년 월드컵 유치 의사 표명을 담은 서한을 국제축구연맹(FIFA)에 보내기도 했다. 이후 경기장 건설 등 여러 부문의 재정부담을 이유로 논의에 진척이 없었지만, 김 전 대통령 취임 이후 큰 힘이 실리면서 결국 월드컵을 유치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와 함께 김 전 회장은 지난해 신장섭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통해 김영삼 정부 시절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막후에서 뛰었다는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 때는 특사 같은 직함을 받아서 공식적으로 역할을 한 것은 없지만,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언질을 받아놓은 게 있었고, 김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