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장윤정 기자 = 대학 시절 한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작은 출판사에서 정해진 시간에 서울 시내 주요 서점을 돌아다니며 그 출판사에 출간된 신간 서적을 구입하는 일이었다. 일당으로 아르바이트비를 받았고, 그다지 힘도 들지 않았으며 해당 서점의 마일리지도 쌓을 수 있어 속칭 '꿀알바'였다.
출판사는 이런 아르바이트를 왜 쓰는 걸까? 도서 사재기는 신간이 나오면 도서를 출판사의 비용으로 사들여 주요 서점의 순위 차트에 올리기 위함이다. 신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면 해당 서적의 판매율이 증가하고 사재기로 인한 비용보다 몇배의 수입을 되돌려 받을 수 있어 출판계에서는 이른바 도서사재기가 공공연한 비밀중의 하나로 존재해 오고 있다.
음반에서 음원으로 가수 및 기획사의 수입원이 바뀌면서 음원차트 올킬이라는 과제가 기획사의 수익 창출 숙명이 됐다. 이같은 추세에 따라 음원 사재기는 음악업계에서 필요악으로 지금까지 인정 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 음원 사재기 논란이 JTBC의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와 인터뷰를 하던 가수 박진영과 이승환 등이 이슈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수면위로 부상했다.
사재기 의혹이 보도된 후 이승환은 JTBC에 출연, 브로커의 실체를 알고 있으며, 억대의 돈을 주면 음원 순위를 올려주겠다며 접근했다고 폭로했다. 또 2년 전 검찰에 사재기의 실체를 고발했던 YG엔터테인먼트의 수장 양현석은 곧 검찰에 재수사를 요청하겠다면서 이번에는 제대로 된 수사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내 음악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인 한국음악콘텐츠산업협회가 나섰다.
협회 측은 5일 사재기 행위 처벌, 정책·기술적 대응 방안 개발, 연구 및 모니터링과 신문고 제도 운용 등의 대책안을 내놨고 이 밖에도 음원 사이트 순위제 검토와 각 방송사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자체 대책 마련을 요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음악 관련 단체들도 이날 오후 음콘협의 조치에 환영의 뜻을 나타내며 사재기 근절 대책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할 것이라고 지지의 뜻을 나타냈다.
음원 사재기나 출판업계의 도서 사재기가 모두 올바름 방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상당수 문화콘텐츠 기업이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리는 이유는 베스트셀러 집계, 음원 판매 순위에 의해 모든 업계 구조의 수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온라인 서점이나 음원 사이트뿐만 아니라 포털에서 검색만 해봐도 현재 음원, 영화, 도서 순위가 실시간으로 노출되고 이를 모든 문화콘텐츠 기업이 최고의 마케팅 수단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 문제가 쉽게 근절될 리가 없다.
일부 팬 카페에서는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이 발표되면 순위를 높이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줄어드는 새벽 시간에 집중적으로 다운로드와 스트리밍을 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일부 아이돌의 신곡이 새벽 2~3시만 되면 차트 1위로 올라오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가요 관계자들 대부분은 이번 음원 사재기 논란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사실 그동안은 대형 아이돌의 컴백일과 겹치지 않기 위해 눈치보기 바빴다면 이제는 노래만 좋으면 얼마든지 그들과 경쟁해 볼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아이돌 가수들 사이에서도 노래와 무대의 완성도 보다는 비슷한 시기에 컴백하는 다른 아이돌의 팬덤에 더 신경을 썼던 것이 사실"이라며 "그만큼 인기 아이돌은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소문으로만 떠돌던 음원 사재기가 중단된 상황에서는 노래만 좋다면 언제든지 인기가 급상승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팬덤과 기획사의 힘이 아닌 노래가 순위 결정의 잣대가 되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장르가 차트 상위권에 포진하게 된다. 실시간 차트로 인기가요를 주로 접하게 되는 대중에게 일부 인기 아이돌의 음악이 아닌, 여러 세대가 다양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의 다양성, 문화의 편식이 종식된다는 의미다.
음원사재기는 사실상 스포츠에서 승부조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콘텐츠의 승부를 조작하고 있는 일이다. 이같은 일이 근절되기 위해서는 해당 업계 담당자들의 윤리적 마인드부터 다시 세워야한다.
음콘협 최광호 사무국장은 "음원 사재기를 기술적으로 100% 차단하기는 어렵다"며 "해킹이나 바이러스처럼 새로운 패턴으로 진화되기 때문에 제도적, 정책적, 기술적 조치가 수반돼야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민관이 총력의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획사 및 음악 종사자들의 인식 제고와 일부 팬덤의 잘못된 충성심, 사재기를 적발할 수 있는 기술적 장치 도입과 정부의 관심 등이 어우러진다면 국내 음악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음원사재기'를 근절시킬 수 있다. 하루아침에 뿌리뽑을 수는 없더라도 조금씩 치유해나가야한다. 병을 인식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근본까지 썩어들어가 전체를 망쳐버릴 것이 뻔하다. 지금부터라도 첫발을 내딛어야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