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종영한 MBC 수목드라마 '맨도롱 또똣'에서 김희정은 겉보기에는 억세고 생활력이 강하지만, 속은 누구보다 정 많고 여린 해녀 김해실을 연기했다. 배우 이한위와 이성재 사이에서 사랑의 줄타기를 하며 알콩달콩 중년의 로맨스를 그려내 시청자의 호평을 끌어냈다. 항간에는 여자 주인공이 강소라가 아니라 김희정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돌았다.
"해실이의 중년 로맨스를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하죠. 그런데 중년의 로맨스가 더 재미있게 보였던 것은 캐릭터의 문제가 아닐까요? 주인공인 강소라와 유연석은 드라마 내내 밀당을 하는데 저희는 아니었어요. 설정도 리조트 사장과 섬에 사는 해녀. 딱 신데렐라 구조잖아요? 그래서 좀 더 명쾌하고 시원한 러브라인을 그려서 사랑받지 않았나 싶어요. 임팩트있게 대본을 써주신 작가님께 감사해요."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춘 이성재에 대해 그녀는 '환상의 짝꿍'이었다고 말했다. "성재 씨와 정말 즐겁게 촬영했다. 붙어있는 시간도 많다보니 연기 호흡도 잘 맞았고, 좋았다"며 미소지었다.
"촬영하면서 저를 힘들게 한 게 딱 한 가지 있었다면 바로 해녀복이에요. 솔직히 해녀복을 입고 물속에서 촬영하는 장면은 거의 없었어요. 물 밖에서 해녀복을 입고 있는 장면이 많았는데 열이 방출이 안 돼서 너무 더웠어요. 몇 시간 찍고 나면 항상 두통약을 먹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 스탭과 다른 배우들을 보면서 타박을 할 수 있나요? 그런 생각도 아주 잠깐일 뿐이었죠."
1991년 SBS 1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김희정은 올해로 25년 차 중견배우다. KBS2 '사랑과 전쟁'의 재연배우로 활동했으며, 2008년 SBS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으로 그해 연기대상 여자 조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MBC '백년의 유산' KBS2 '왕가네 식구들'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해 대중에 얼굴을 알렸다.
배우 김희정에게 '사랑과 전쟁'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재연배우' 타이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과거 '사랑과 전쟁'에 출연했던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물론 '재연배우' 타이틀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어요. 그때는 그런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것도 놀라웠는데, 어쨌든 저는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제대로 나왔고, SBS 공채 탤런트로 당당히 합격해서 활동했는데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고, '재연드라마에 나온대' '재연배우 출신이 출세했네' 등 뒤에서 말들이 많았어요. 저는 제게 주어진 연기를 한 것뿐인데 그게 왜 사람들한테 하대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김희정은 '사랑과 전쟁'을 새로운 발판이 된 기회라고 표현했다. 그 작품 속 모습을 보고 드라마 감독의 캐스팅 제안을 받았고, 지금까지 단단해져서 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런 역할은 하고, 저런 역할은 하지 않으면서 배역을 가리는 것을 자존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하고, 그것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 그게 진정한 자존심이라고 생각해요. 어디서 어떤 연기를 하든, 어떻게 하는 그 과정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 나이가 들면서 '잔류에도 흔들리지 말자'라는 목표가 생겼어요. 댓글을 보면서 상처받는 분이 주변에 많은데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무조건적인 비난을 하는 것보다 서로 용기를 복돋워 주는 말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연극이 좋아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김희정은 당시 자신이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시절 4년동안만 연극 활동을 하고, 사회에 나가면 일반적인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벌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3학년 때 서울방송국이 생겼고, 취업삼아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서 오디션을 본 것이 연예계 데뷔로 이어졌다.
"연예계에서 막 걸음마를 뗐을 때 '배우라는 직업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의에 의해서 못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저를 원하는 곳이 있어야 작품에 출연할 수도 있고, 아무도 저를 선택하지 않으면 연기할 수 없으니까요. 단지 저는 제게 주어지는 역할을 최선을 다해 소화하려고 노력했고, 그럴 때마다 하늘에서 저에게 '배우'의 길로 가는 다리를 놓아주더라고요.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연기를 하고 있다보면 드라마 출연 기회가 생기고, 이번에는 제 인생의 첫 상업영화 '연평해전' 출연 기회까지 생겼고요. 이제 저의 목표는 죽는 날까지 연기하다가 가는 거예요."
500만 관객을 돌파한 올해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 '연평해전'에서 주인공 이현우(박동혁 역)의 말 못하는 엄마로 등장한 김희정은 짧지만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연기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SBS '조강지처클럽'의 모지란, KBS2 '왕가네 식구들'의 박순정, 영화 '연평해전'의 말 못하는 벙어리 엄마 역할까지, 시청자가 김희정이라는 배우를 떠올리면 분명 이 시대의 '아줌마'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미혼이다.
"'아줌마 전문 배우'요? 물론 그런 딱지가 생겨버리면 주어지는 배역에 한계가 있어요. 저를 만나지도 않고, 저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줌마 이외의 캐릭터에는 캐스팅하려고 하지 않죠. 그래서 한때는 '아, 배우들이 이래서 이미지 관리를 하는구나' 생각했었는데 어쨌든 저는 제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이 됐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또 살아보니까 오늘같은 날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웃음)"
백화점보다는 시장을, 1회용 종이컵을 사용하기 보다는 머그잔을 사용하고, 고급스러운 곳보다 일상적인 장소를 선호한다는 김희정. 그녀는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맨도롱 또똣'의 해실 역을 소화하기 위해 제주도 첫날부터 해녀를 한참이나 관찰했고, '연평해전'에서 언어장애우 역할에 캐스팅됐을 때는 직접 장애인복지시설에 방문, 수화를 익히고 그 사람들의 감정에 동화되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자신의 그릇에 맞게 살자'가 인생의 모토라는 김희정은 "남의 큰 그릇을 부러워하면, 그 순간부터 나 자신은 불행해진다"며 "사람들은 항상 본인이 갖고 있는 조건보다 더 좋은 것을 보고 부러워하는데 그로 인해 불행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스타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 배우들에게는 타고난 그들만의 그릇이 있다. 나는 내 그릇에 맞게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연기는 누구와 비교해서 잘 되는 게 아니다. 나와의 싸움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경쟁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본인의 인생 철학을 밝혔다.
"10년 뒤 좋은 연기자로 기억되고 싶어요. 오래 버텨서 아직도 기억되는 연기자요.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에요. 현재의 부족함을 조금씩 메꾸면서 연기하고, 살다보면 10년 뒤에는 좀 더 발전한 배우가 되어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