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임권택 감독의 세련된 연출·안성기의 명불허전 연기보다 빛나는 김호정

2015-03-27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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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는 스포일러성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진=영화 '화장' 포스터]

아주경제 권혁기 기자 = 먹먹하다. 이미 제7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제39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제33회 밴쿠버 국제영화제,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제34회 하와이 국제영화제, 제25회 스톡홀름 국제영화제, 제9회 런던한국영화제, 제29회 마르 델 플라타 국제영화제, 브리즈번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제8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상, 제25회 싱가포르 국제영화제, 제36회 뉴라틴아메리카 영화제, 제19회 케랄라 국제영화제, 제65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29회 홍콩 국제영화제 등 세계 16개 영화제에 초청돼 극찬을 받은 거장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신작 ‘화장’(제작 명필름)이 내달 9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김훈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화장’은 화장품을 바르거나 문질러 얼굴을 곱게 꾸민다는 ‘化粧’과 시체를 불에 살라 장사를 지낸다는 ‘火葬’,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머리에 종양이 발견돼 이미 한차례 수술을 받았던 아내(김호정)의 머리에 두 번째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오상무(안성기). 오상무는 전문 간병인 못지않게 아내의 수발에 능숙하다. 피곤하지만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화장품 대기업 중역인 오상무는 병원에서 출퇴근을 한다. 익숙한 듯 자신의 사무실에는 여러 벌의 와이셔츠가 준비돼 있다.

아내의 부재 중 자신의 부서의 홍보담당자로 출근한 추은주(김규리) 대리를 처음 본 오상무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인다. 젊은 여성의 싱그러움도 싱그러움이지만, 화장품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소비자단체 회장의 억지 주장에도 ‘애사심’을 발휘, 소신을 굽히지 않는 모습은 회사에 젊음을 바친 오상무에게 있어 매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부서 회식에서 고급 와인 ‘지공다스’를 마시던 추은주의 “중후하다는 건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오상무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추은주는 오상무에게 지공다스를 선물하고, 오상무는 병원에서 소주 대신 마신다. 아내는 평소 마시지 않던 와인에게서 낯선 여인을 느끼고 “얘기해봐. 내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지?”라고 남편을 다그친다.

죽음을 앞둔 아내는 지금의 오상무를 있게 한 배우자이다. 대학시절 뒷바라지부터 현재 남부럽지 않은 부(富)는 모두 아내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애정은 없었다. 아내와 함께 휴식차 찾아간 별장에서 성관계를 맺기 전 준비과정으로 ‘비아그라’를 먹는 오상무의 모습은 이를 방증한다. 애정없는 성관계에서 오상무는 추은주를 상상한다. 아내 역시 그런 오상무의 마음을 알고 있다. 그래도 아내는 끝까지 오상무와 잠자리를 한다.

아내는 자신이 죽고 키울 자신이 없으면 키우던 개 ‘보리’를 함께 보내달라고 한다. “주인따라 가야지 어쩌겠어?”라고 하고 오상무는 “당신 죽으면 안락사 시킬테니 걱정 말라”고 말해 서운함을 자아낸다.
 

[사진=영화 '화장' 스틸컷]

결국 세상을 떠나자 하루라도 빨리 아내의 흔적을 지우려는 오상무.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으며 장례식장 빈소 한켠에 마련된 휴식실에 누워 딸 미영(전혜진)에게 “집에 있는 엄마 짐이랑 옷가지들 정리해 재활용할 수 있게 단체에 보내라”고 말했다. 미영은 “그런다고 엄마가 금세 사라지겠느냐. 아빠는 원래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어”라며 눈물을 흘렸다.

오상무는 빈소를 찾은 추은주를 보면서도 ‘색’다른 생각에 빠진다. 절을 하는 추은주의 모습에서 가슴골이 더 눈에 들어온다. 자꾸만 추은주를 더 보고만 싶어진다.

임권택 감독은 102번째 작품에서 더욱 세련된 연출을 자랑한다. 러닝타임 94분에 불필요한 장면은 하나도 없다. 캐릭터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카메라 워크와 테이크는 몰입도를 높인다.

명불허전 안성기의 연기는 아내와 젊은 추은주 사이에서 갈등하는 오상무 그 자체이다. 안성기 외에 오상무를 연기할 다른 배우는 생각나지 않는다. 김규리 역시 안성기와 발을 맞추며 추은주에 녹아들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젊은 여성 부하직원에게 흔들리는 오상무를 이해하게 만든다.

압권은 김호정. ‘내 사랑 내 곁에’의 김명민에 못지 않은 투병 장면은 메소드 연기의 극치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다. 특히 ‘변’을 지린 자신을 씻겨주려는 남편 오상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비쩍 마른 김호정의 몸은 그가 영화를 위해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각고의 노력을 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일각에서 언급됐던 ‘성기 노출’은 없다.

오상무의 상상 속에서, 화려한 꽃가마에 누운 김호정의 평안한 표정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상여를 쫓아오는 추은주를 뒤돌아 바라보는 오상무, 그를 옆에 두고 짓는 표정이라 더욱 생각이 많아지게 만든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연기를 펼친 김호정은 빛났다.

주연배우들 외에도 연우진, 김병춘, 김영훈, 여민정, 박정식, 어성욱, 김선하, 김연수, 안석환, 예지원 등 조연들의 연기도 작품 완성에 한몫했다.

청소년관람불가로 내달 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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