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19일 해당 글이 ‘경성중동학교장 최규동’이라고 명시돼 있다고는 하지만 자발적으로 본인이 쓴 글인지, 강제에 의한 것인 지, 명의가 도용된 것인지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부 행위를 침소봉대해 전 생애에 걸쳐 확인된 항일운동과 민족교육의 삶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교총은 본인이 자발적이든 강제든 쓴 글이라 하더라도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던 시기에 지시를 어기면 결국 학교 폐쇄라는 위기 속에서 불가항력적인 선택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하고 만약 친일행위에 심대했거나 문제가 됐다면 1994년부터 2009년까지 15년 동안 집필·간행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어야 하지만 포함되지 않은 이유도 살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총은 확인된 최규동 선생의 항일운동과 민족교육을 살펴보면 끝까지 창씨개명 거부했고 조선어를 금지하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우리말 수업을 고수, 조회 때마다 우리말 훈시 통해 학생들에게 민족정신 고취, 일본식 교과과정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고등보통학교도 거부(당시 서울의 여타 학교는 일본인 교사수가 7~8명에서 최고 20명까지였으나, 중동학교는 2명의 일본인 교사만 둠), 수업 시간에도 눈물을 흘리며 우리 민족의 아픔과 우리 민족의 장래를 이야기하고 교표에 무궁화를 넣어 만들고 우리의 자제는 우리 손으로 교육시키자 주장하는 한편 1934년에 진단학회 찬조위원으로 참여해 적극 지원(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해 정부도 이를 인정하고 1963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서훈하였고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바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