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기자 입 막는 기자간담회

2014-07-2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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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군도' 시사회 [사진=남궁진웅 기자]

아주경제 홍종선 기자 = 지난해 7월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의 9월 한국 개봉을 앞두고 이웃나라 기자들을 초청했다.

당시 ‘바람이 분다’는 국내 공개 전부터 우려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가미가제’로 쓰인 제로센 전투기 설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군국주의를 옹호한다는 비난이 거셌고, 동시에 감독이 표현하고자 한 주제의식은 염두에 두지 않고 소재만으로 오해 받고 있다는 우려도 컸다.

한·일 양국에서 뜨거운 논란이 일던 때였기에 미야자키 하야오를 직접 만난 기자들은 질문을 쏟아냈고 제작사와 국내 수입사가 비용을 댄 영화 관련 행사임이 무색할 정도로 감독의 역사관을 캐묻는 회견이 됐다. 수입사는 난색을 표했지만 기자들을 통제하지 않았고, 미야자키 감독은 “열심히 살았다는 것만으로 역사적 단죄를 면할 수 없다”는 주제의식을 차분히, 질문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여러가지 표현으로 되풀이했다.

작품 자체에 국한된 질문만 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해도 무리가 아닌 자리였다. 단순히 그쪽에서 비용을 대 초청했기 때문이 아니다. 기자들의 질문이 영화와 직접 관련이 없는, 한·일 관계와 역사문제에 대한 감독의 견해를 묻고 있었다. 낯빛 한번 붉히지 않고 온화한 표정과 말투로 설명을 이어가는 인간 미야자키 하야오의 친절을 넘어선 관용적 태도와 솔직한 의견 개진은 자못 감동적이었다.

그 뒤 미야자키 감독은 한 달여 지나 9월 초, 청천벽력과도 같이 ‘은퇴’를 선언했다. 그사이 감독은 한국 기자들 앞에서 한 발언, 그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 감각’'이 살아있는 표현들로 인해 자국 내 우익 인사들로부터 무던히 공격을 받았다. 결코 한국 기자들의 그의 은퇴를 종용했거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자회견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으로서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붓을 놓겠다는 선언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다.

자연과 인간을 동등한 세상의 주인으로 보는 철학이 아름다운 수채화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그의 작품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아이들이 숲에서 뛰어놀기를 바라며 숲에 가면 예상치 못한 즐거운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주제를 담아 ‘이웃집 토토로’를 그렸는데 도리어 아이들이 TV 앞에 앉아 바로 그 애니메이션을 보게 됐다며 자신의 ‘죄’를 고하던 감독에게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부끄러웠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지난 14일 열린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 시사회에서는 사뭇 다른 풍경이 연출됐다.

‘용서받지 못한 자’ ‘비스티 보이즈’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를 통해 좋은 호흡을 과시해 온 윤종빈 감독과 배우 하정우가 네 번째로 만난 ‘군도’에 대한 기대가 컸던 데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예상 밖의 가벼움에 영화를 본 기자들의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봇물 터지듯 질문이 쏟아질 분위기였다.

후끈 달아오른 취재열기 속에 윤종빈 감독을 시작으로 멀티캐스팅 영화답게 하정우, 강동원을 비롯해 9명 배우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드디어 질문하려는 기자들의 손이 올라가려는 순간, 기자간담회 진행을 맡은 홍보사 대표는 무려 10명이나 되는 참석자에게 일일이 질문 하나씩을 던졌다. 마치 기자들이 잊었을까 영화 속 캐릭터와 인상적 활약을 복습시키는 질문이었다. 대관 시간이 있어 끝이 정해져 있는 행사에서, 기자들을 불러 치르는 언론시사회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기자들이 질문하지 않아 행사가 ‘썰렁할까봐’ 미리 준비한 고육지책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영화를 만든 쪽에서 알리고 싶은 것만 홍보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 아무거든 기사만 나가면 되는 것인가, 묻고 싶다.

기자는 묻는 사람이다. 관객을 대신해, 대중을 대신해, 국민을 대신해 묻는 사람이다. 그 대표성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기자의 본분이고 그것을 막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질문 받을 자의 의무다.

약간의 소란 뒤에 ‘군도’ 감독과 배우들에게 기자들이 질문할 시간은 다행히 주어졌다. 처음부터 기자가 할 일을 영화 홍보사에서 애써 대신하려 들지 않았다면, 더욱 다채로운 질문들이 예비 관객의 궁금증을 해소했을 것이다. 화제작 ‘군도’인데, 배우 하정우 강동원에 이성민 이경영 조진웅 마동석 김성균 윤지혜 김성균이 자리했는데 진정 질문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일까. 날선 질문 속에도 기자들의 입을 막지 않았던 ‘바람이 분다’ 관계자들의 자세, 나아가 관객 존중을 배워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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