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의 아트Talk]김구림 화백 "정체성이 없다고? 내 과거를 몰라서 하는소리"

2014-07-1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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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갤러리에서 '진한 장미'개인전 2000년대 이후 성형천국 꼬집은 신작 전시

김구림화백이 아라리오갤러리서울에서 진한 장미를 타이틀로 17일부터 전시를 연다. 사진=박현주기자]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2012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열린 ‘A Bigger Splash : painting after performance’ (부재 : 퍼포먼스 이후의 회화) 전은 한국미술계를 깜짝놀라켰다. 
 전 세계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인 잭슨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니키드 생팔, 쿠사마야요이, 신디셔먼 등의 20세기 현대미술사에 획을 그은 유명작가들과 함께 우리나라 작가인 김구림 화백이 이름이 들어있었기때문이다.  김 화백은 이 전시에 1969년에 펼쳤던 행위예술을 담은 사진을 내놓았다. 당시 서울에서 여성 모델의 몸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며 시도했던 ‘보디 페인팅’ 퍼포먼스 과정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해외에서 알아본 김구림 화백(79)의 주가는 다시 반짝 올랐다. 잊혀가던 김 화백의 전시가 이어졌다. 2013년 통인화랑에서 개인전에 이어 서울시립미술관에서도 회고전성격의 전시가 열렸다.

 지난 4월에는 대안공간인 플레이스막에서 설치전이 열려 화제였다. 그의 대표작 '음양시리즈'로 '성형천국'을 꼬집는 작품전이었다. 특히 쇠가 미간에 박혀있는 얼굴부조와 물이 가득찬 배 설치작품은 주목받았다. 물안에는 모형사과와 뱀, 조각난 마네킹 팔과 머리가 잠겨있다. 전위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은 70대후반의 작가라고는 상상을 못할정도로 감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시를 본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가 김구림이라는 작가가 젊은작가인지, 그 김구림 화백인지를 물어볼 정도였다는 것.

 '한국 대표 전위미술가' 라는 수식어가 붙은 김구림화백(79)의 전시가 또 열린다.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와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회고전 성격의 전시를 펼친다.

 
인터넷 세상, 현란함이 넘치는 시대 탓일까.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연 전시는 잦은 전시탓인지 식상한 느낌을 전했다. 그는 아방가르드다'는 타이틀도 신선함을 주진 못했다.  여성의 얼굴과 몸을 잘라붙이고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듯 칠한 그의 작품은 열정과 치기가 지배한다.

"나는 매년 전시를 했어요. 사람들이 몰랐던 것뿐이지요."

17일 아라리오갤러리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열기가 대단했다. 흰 머리와 흰눈썹으로 얼굴엔 서리가 내렸지만, 검은 눈동자는 상대방을 쏘아보며 빛을 냈다.
  
"나는 모든 면에서 단 한 번도 주위를 의식하고 작업한 적이 없어요. 화단에서는 날 이단아 취급하지만 난 내가 뭘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작업할 뿐입니다."

 알려진 그림속에서 최신작은 무엇이냐고 묻자 손가락 뼈가 화면 정가운데 붙인 작품을 가리켰다. 아직 마감이 덜돼 사인을 안한 상태라고 했다. 또 젊은시절 읽었던 노자 맹자 공자 책을 파내고 성적인 이미지들을 조합한 설치작품도 있다. "책 정리를 하다 버리기 아까워" 작업했다는 '진한 장미' 시리즈다. 대중 매체 속 다양한 이미지와 일상 속 오브제가 어우러지며 숨겨진 욕망을 드러낸다.
  

[아라리오갤러리 김구림화백 개인전. 사진=박현주기자]

[Yin and Yang 8-S 160>2008, 디지털 프린트, 캔버스에 유채, 162.2×399.0cm]



김 화백은 "현실과 사회가 나를 이런 작업을 하도록 유도했다"고 설명했다. 여성들의 누드와 얼굴이 주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2000년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시작됐다.

  귀국했더니 예전에 상상하던 한국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발전한 가운데 성형외과 간판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김 화백은 "TV에 나온 옛 가수는 성형수술을 하도 많이 해 짐승보다 못한 괴물이 됐더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공장에서 뽑아낸 개성 없는 마네킹이 왔다갔다하는 것 같았다"고 꼬집었다.

자신감은 넘쳤다. '옛날의 영광'이 힘인 듯했다. 그는 1969년 한국 전위예술에 획을 그은 '제4집단'을 결성하는 등 1960∼70년대 행위예술과 비디오아트 등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이른바 '스타 작가'였다. 1970년 최초의 대지미술로 꼽히는 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 등의 작업을 진행할 때는 "기자들이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등 언론의 관심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졌다. 미국에서 15년간 있다오자 한국 미술계는 변했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창작열을 불태웠지만 이름은 대중에게 잊혀진 지 오래였고 미술계에서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

 옛날이야기를 하던 그가 "한국미술계는 '끼리끼리'문화"라며 불평을 터트렸다. "우리나라는 학맥 인맥이 얽혀있잖아요."  국내 아방가르드 대표주자지만 대접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한듯 했다. 그는 대학을 1년만에 때려쳐 고졸출신이라고 했다.

 수모를 당했던 일도 떠올렸다.  지난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은행에서 자신의 작품을 구입키로 했다가 하루 만에 취소한 일이다. "뒤집을까하다가 중간에 추천한 지인때문에 참았다"는 그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작품가격도 후려치는 미술관 심사에 울화통이 터져 "앞으로 작품을 안팔겠다"고 했다. 이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작품구입이 진행되고 있는데 작품값은 국내와 달리 수억원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화백의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젊은시절부터 '정신나간 이상한 놈'과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사람은 '김구림은 정체성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내 과거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사고가 변하고 사고가 변하면 작품의 표현 방식도 변해야 하죠."

 성장배경과 무관치 않다.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잣집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금이야 옥이야' 크며 하고싶은 것, 갖고싶은 것 모두 가졌다. 남들이 하는 것은 무조건 싫었다는 그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며 삐뚤어졌다. 이런 사고방식은 그가 전위미술을 하게된 원동력이 됐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라이프지와 예술잡지를 보며 미친듯 전위 미술에 심취했다. 고졸이지만 그의 미대출신 작가들과 일대일 토론을 벌이며 제압했고 1969년 한국 전위예술에 획을 그은 '제4집단' 수장이 되기도 했다.

[김구림, 진한장미 2003 Mixed Media on Book 23.0×15] 


 김 화백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돈 문제다. "비용 등의 문제 때문에 구상만 하고 제작이나 발표를 하지 못한 작품이 많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아, 어느 미술관에서 마음껏 전시하라고 한다면요?. 내가 춤을 추죠. 그런데 안해줍니다. 해주면 하늘의 복이죠."

너털 웃음을 쏟아낸 그는 "죽을 때까지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다가 갈 것"이라며 노화백의 패기를 보였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김구림 전시는 '진한 장미'를 타이틀로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김 화백의 2000년대 이후 신작을 선보인다.  '야한 사진' 등을 콜라주한 '진한 장미' 시리즈를 비롯해 작품 160점을 소개한다. 천안에서는 오는 29일부터 '그는 아방가르드다'전을 펼치며 김 화백의 1960∼90년대 작업을 연대기적으로 조망한다. 한국 최초의 실험 영화인 '1/24초의 의미'와 비닐을 그을려 표현한 '핵' 시리즈, 대지미술 '현상에서 흔적으로' 등 대표작 40여점이 소개된다.(02)541-5701

 
◆김구림=1958년 첫 개인전을 연 후 그의 인생이 싹 달라졌다.  10년위인 선배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김종배라는 이름을 버리고 개명했다. 은사인 백낙종선생이 지어준 김구림 이름이 탄생했다. '언덕구 수풀림'의 구림은 한국현대미술계를 발칵뒤집었다. 1969년 실험그룹인 <제4그룹>을 결성하고, 한국현대사회의 기성문화를 비판한 해프닝 <콘돔과 카바마인>, 기성문화를 비판한 해프닝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과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경복궁 미술관을 흰 베로 감는 작업과 같은 일련의 퍼포먼스러 충격을 선사했다. 뿐만 아니라 기성영화의 틀을 깬 한국 최초의 전위영화 <1/24초의 의미>와 <무제>, 최초의 라이트 아트인<공간구조 69> 문명사회에서 미디어의 문제를 다룬 최초의 메일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과 한국 최초의 대지예술인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를 발표했다. 연극과 영화, 무용의 무대미술과 연출활동까지 장르를 초월하며 줄곧 한국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던 그는 1980년대 중반 자신의 양식에 안주해버린 동년배 작가와 달리 자신의 입지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시대정신과 감수성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가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을 추구해왔다. 1990년대부터 음양사상을 기초로 한 다양한 세계의 조화와 통합을 모색하는 작품활동을 통해 현대문명사회에 대한 예술적 비판과 작가적 성찰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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