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124명의 복자 중 4분이 청양 분이라고 하니 참으로 대단하다 할 것이다. 그 중 한분이 이도기이다.
1. 이도기의 생애,
이도기는 1743년 청양현(마을 미상)에서 태어났다.
이도기의 이러한 선교행적이 소문나자 칠갑산 너머 정산현으로 피신 차 이사를 했다.
정산으로 이사를 온 후 그는 옹기점을 내고 마을로 옹기를 팔며 다니면서 정산에서도 전교를 계속했다. 그가 다녀간 마을 중 주민 모두가 천주교에 입교한 마을도 있었다.
이러한 행적은 그를 싫어하는 주민도 있어 김이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이 그를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관청에 고발하겠다는 위협에 “잠시 피해있어라”라는 아내의 권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2. 옥살이와 이어지는 고초
정산에서도 이도기의 활동과 천주교리가 점차 확산되어가고 있을 무렵인 1797년 윤 6월 천주교에 적대감을 갖고 있던 한용화가 충청감사로 부임하면서 천주교의 우두머리를 체포구금 할 것을 각 수령에게 명하자 정산현감 채윤전은 윤 6월 8일 포졸 10여명을 그의 집에 보내 체포 포박하였다.
포졸들은 포박한 이도기를 마을 인근 숲속 큰 나무에 매달고 숫한 매질을 하고 정산관아 감옥에 그를 가둬 1년여의 옥살이가 시작된다.
옥살이 중 장날이면 역촌 장에 끌고 나가 장꾼들이 보는 가운데 숫한 매질과 배교 할 것을 강요당했다.
장꾼들 중에는 동정보다 심한 욕을 하는 사람과 매질을 합세한 사람도 있었으며 정산현감 채윤전은 풍헌직 벼슬을 내려줄테니 배교를 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또한 이도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녀들의 신앙심이 무너질까 두려워 면회를 오지 말도록 하고 면회는 그의 아내만 하도록 하면서 신앙심을 지켜나갔다.
곤장과 태질, 모욕과 배교설득으로 이어지는 옥살이 생활 1년이 넘은 1798년 6월 12일 채윤전 정산현감은 이도기를 죽일 것을 명하니 포졸들은 심한 고통으로 이어지는 매질로 그의 나이 56세에 죽음을 맞이한다..
3. 성지의 재조명과 내륙관광중심도시로 거듭나길 바라면서
1700년대 말 조선정국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역사기록에서 잘 알고 있다 하겠다.
이도기에 대한 일련의 사건은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1752~1801) 등을 체포하기 위한 박해로 우리지역에서 일어난 정사박해의 대표적인 기록으로 제작연대와 작가는 알 수 없으나 이도기의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구전되어 오는 것을 “정산일기”라는 표제로 전해오는 54쪽의 서책과 청양군지 등을 통해 정리 한 것이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아직까지 조명되지 않았던 이도기의 생애를 되돌아보고 당시 이도기가 죽음을 맞이했던 정산관아인 정산면사무소에 체험을 할 수 있는 옥과 이도기의 작은 비라도 세워 성지로써의 가치를 부여함이 옳을 듯하다.
그러면 우리군에는 화성면의 줄무덤과 정산면을 잇는 600만명의 카토릭 인구의 성지로 청양의 동과 서를 잇는 아주 메리트 있는 순례코스가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특히 청양은 청양읍을 중심으로 정산면과 화성면을 이동하기 위한 유동인구가 늘어 경제유발효과가 클 것이고 종교의 관광자원과 청정청양을 축으로 하는 웰빙과 힐링을 겸한 내륙관광중심문화도시로 성장할 것이다.
글, 청양군 기획감사실장 정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