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이 남자, 터프한 이 세상에 정면으로 맞섰다. 거칠고 드라마틱하게 인생을 헤쳐왔다.
정치에 꿈이 있던 소년에게 고등학교 진학 실패는 인생을 소용돌이 치게했다. 곧장 검정고시로 들어간 대학생활은 기대에 차지 않았다. 1년만에 때려치고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군 생활 1년후 베트남 전쟁 첩보대원으로 지원해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겪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의 부패, 인간의 잔인성, 삶의 신비, 극한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을 체험했다.
제대 후 미 국무성 초청 교환 학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유니온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세속적인 출세에 흥미를 잃고 모든걸 내려놓고 만다. 플로리다에서 공장 노동자, 유도와 태권도 사범 술집 문지기, 바텐더를 전전하며 술과 마약에 빠져들었다.
'갈때까지 가본 인생'을 살아냈다는 화가 최동열(63)이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작업에 천착해오고 있는 그는 '자유로운 영혼 보헤미안'으로 통한다.
◆미술세계로 입문= 여자가 인생을 구원했다. 19977년 지금의 아내이자 평생동지인 미국 화가 엘디(L. D.로렌스)를 만나 그림에 빠져들었다. 엘리옆에서 붓글씨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어렸을적 반 고흐와 폴 고갱을 동경하던 모습이 떠올랐다.정육점에서 고기를 싸는 종이를 한통사와 100m나 되는 종이위에 뛰는 말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그림은 그의 본성을 자극했다. 미국 서부 남부와 멕시코를 떠돌며 문명세계와는 거리가 먼, 원시적 수렵생활을 하며 작업했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작품이 상업적으로만 이용되는 상황에 크게 회의를 느끼고, 예술가로써 한동안 방황하게 된다. 자연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에서 뉴욕을 떠나, 인적이 없는 멕시코 유카탄 코바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스스로를 되찾은 그는 신들린 무당처럼 작업하며 대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완성된 대작들로 세계적인 작가들이 운집해있는 뉴욕의 이스트빌리지에서 전시를 하며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세계 각지를 유랑하며 고독하고, 힘든 생활을 겪으면서도 폭력과 공포마저도 아름답게 승화시킨 그의 그림은 당시 80년대 평론가들로부터 열띤 호평을 받았다.
"80년대는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시기였다"고 회상하는 그는 당시 바스키아, 키스헤링, 앤디워홀과 어울리며 예술가로서 재미있고 생생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예술혼 찾아 귀국= 미국에서 명성을 뒤로하고 1987년 15년만에 서울로 금의환향했다. 그는 그 시절 자신의 화두였던 ‘한(恨)’을 만나기 위해 아내와 10개월 된 딸을 데리고 전남 해남과 진도 여귀산 기슭 탑리에서 생활하며 작업하기 시작했다. 특히 진도는 바다와 산, 하늘과 바람, 무수한 별들이 있어 미국서도 보기 드문 곳으로, 한국적 정서가 스며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최동열은 예술을 통한 동서양 만남을 시도하며, 초인 시리즈, 진도의 장례식 풍경 연작을 쏟아냈다. 또 한국의 정치, 사회적 모순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업도 시도했다.
이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그는 뉴욕과 워싱턴주 올림픽반도를 오가며 작업했다. 미국 서북부에 있는 염소 농장에 매료돼 연어 낚시, 등산, 정원가꾸기를 하며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중국의 우루무치, 돈황, 나주, 서안을 비롯해 티벳 네팔 인도의 시킴 라다크 등을 답사하며 동서양 예술의 융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안과 밖’ 시리즈 대표작 탄생= 1984년 멕시코 유카탄반도를 여행하며 길에서 바라보던 실내를 작품으로 옮긴 것이다. 이후 1996년, 올림픽반도 작업실에서 작가는 한국에서의 삶을 회상하며 한국의 이불, 요, 베개,장, 화장대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깥풍경을 배치하며 한국의 정서를 담았다.
이후 뉴욕으로 이주한 작가는 1998~2000년에는 뉴욕의 야경을 작품의 배경을 삼았다. 2001년부터는 동양화로 처리된 산수와 올림픽반도의 작업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산수를 실내 정물과 배치했고, 2004년에는 경기도 이천에 거주하며 한국 산수를 배경으로, 도자기와 누드를 연결시키도 했다.
거처를 옮길 때마다 그곳의 정서를 바탕으로 도시와 정물, 누드와 자연을 배치해 ‘안과 밖’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신들이 거주하는 성스런 산, 히말라야에 직접올라 인간의 초월적 정신세계를 화폭에 표현하고 있다. 오는 10월에도 또다시 히말라야로 떠날 계획이다.
◆홈리스, 타임라인전= "거기 같이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집은 의미가 없다" 스스로 '홈리스'라고 칭하며 동서양을 떠돌아 다니는 그는 물처럼 거침이 없다. "이렇게 살아온 날들에 후회가 없다"는 그는 자신이 별나 보이는 것도 모두 작품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했다.
딸 아이도 다 자라 영화감독이 됐다는 그는 이제 홀가분하다고 했다. "실력은 늘었는데 정열은 약해졌지만 다시 30대로 젊어진 것 같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보다는 작품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붓을 잡은지 38년, 전업작가로서 매순간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을 볼수 있는 전시를 선보인다. 오는 26일부터 선화랑에서열리는 '최동열의 타임라인 : 1977∼2014'전에는 유화 드로잉등 50여점을 내놓았다.
환갑이 넘은 중견 작가들이 꽃이면 꽃, 추상이면 추상, 구상이면 구상등 하나의 주제와 소재에 꽂혀 연작에 몰두한 반면 최동열의 작품은 어느하나로 규정지을수 없는 자유로움이 특징이다. 강렬한 색채와 파격적이고, 직설적이며 때로는 추상에 가까운 작품은 솔직한 감흥이 넘친다.
"전업작가로서의 재능이라,.. 님블(nimble)이란 말이 있어요. 율리시스에 나오는 말인데 '님블'이 중요한 것 같아요. 혹자는 만델라가 수없는 옥고를 치르면서도 오랫동안 살아남은건 님블했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
"뭐, 그걸 타협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그것보다 (파도를 타듯 넘나드는)적응이 나을 것 같네요. 님블 못하면 갑니다.하하~" 전시는 3월11일까지.(02)734-0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