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송암 엄춘보 한일철강 회장은 어느 정도 전쟁 복구가 진행되자 사업 아이템을 철판으로 바꾸고 1955년에 신화실업에서도 경영에 손을 떼게 된다.
엄 회장은 철판을 판매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른 상품은 가짜가 많고 성분을 속이는 일이 많았지만, 철판은 치수만 확인하면 서로 속고 속는 일이 없고, 또 유행을 타지 않는 상품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엄 회장은 철판판매업이 본격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자, 일본을 다니면서 일본의 앞선 기술을 보고, 앞으로의 철강사업을 지금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철강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소규모 도매상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법인을 세웠다. 이 회사가 바로 1957년 12월에 설립된 한일철강 주식회사다.
한일철강은 대한중공업(인천제철 전신)에서 철판이 나오기 시작하자, 1963년 대한중공업 철판대리점으로 선정됐다. 철판 공급이 안정되면서 철강 관련업체들도 늘어나게 되는데, 엄 회장은 철강사업을 하는 업체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유대관계가 필요하다고 보고 관련 업체를 모아 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이것이 한국철강상협회였다. 회장사는 한일철강, 조합장은 엄 회장이 맡게 되는데, 철강업계가 조합을 결성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철강업계가 하나로 모이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1973년에 포항제철(현 포스코) 제1기 공장이 준공되면서 처음으로 품질은 다소 불안정 했지만 제품다운 철강재가 탄생하게 된다. 엄 회장은 포항제철의 경인지역 판매 대리점 요청을 받고 이를 수락한다. 포항제철의 제1호 대리점이 된 것이다. 당시에 업계에서 쌓아온 엄 회장의 경력, 평판과 영업실적 등이 좋게 평가 받는 순간이었다.
◆제조업 진출, C-형강 국내 최초 생산
1974년, 엄 회장은 단순한 철판 유통에서 벗어나 제조업을 하기로 한다. 우선 2000평 규모의 서울 등촌동 부지에 경량 형강을 생산할 수 있는 성형기를 설치하고, 건축자재로 보급시키고자 C-형강을 선택했다. 당시 국내에는 C-형강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는데, 한일철강을 통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국산 C-형강이 탄생했다.
엄 회장은 파이프를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1976년 등촌동에서 가까운 가양동에 6000평 부지에 공장을 짓는다. 강관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엄 회장은 당시 강관회사에서 자동차 회사로 전환하게 된 기아산업의 조관기를 인수하게 된다. 한일철강의 강관 역사를 따지자면 기아산업의 강관역사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조관기로 파이프를 생산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국내 절단기 수준이 좋지 않아 정확하게 재단하기가 어려웠고,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제품과 품질을 위해서 엄 회장은 일본회사를 방문했을 때 보아두었던 절단기를 일본에서 수입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큰 가격차에도 불구하고, 일본산 절단장비(Shear Line)을 국내 최초로 설치항 것인데,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겠다는 엄 회장의 성격을 그대로 실천으로 옮긴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