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삼성직무적성검사(SSAT, Samsung Aptitude Test)를 시행하는 날이다. 삼성그룹은 총장추천제는 유보됐지만 애초 밝힌 채용 제도 개선안에 포함된 SSAT 개편은 그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개편안 때문에 응시생들은 별도의 준비를 추가로 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게 되지만, 올 하반기에 또 어떻게 제도가 바뀔지 모르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이러다 보니 예년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사람들이 SSAT에 몰려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실제로 2011년 10만 명에 달했던 SSAT 응시자 수는 2012년 13만 명에서 지난해에는 무려 20만 명이 지원했다. 지원서에서 자기소개를 쓰지 않도록 해 전형과정을 간소화한 덕분이었는데, 지원서에는 이름, 주소, 전화번호, 출신학교, 학점, 외국어 점수 등만 써넣게 돼 있고, 지원하면 무조건 시험을 칠 수 있었다.
개별 기업에 20만 명이라는 사람이 몰린다는 것이 숫자는 어떤 의미냐 하면,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가 발표한 ‘2012년 교육기본통계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반대학 졸업자 수가 29만8727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대학생 대부분과 청년들이 SSAT에 도전한다고 볼 수 있다.
지난 3년간 삼성그룹이 SSAT 응시자들을 대상으로 한 채용규모가 9000명 선에 머물렀음을 고려할 때 합격을 위한 경쟁률은 2011년 11.1대 1, 2012년 14.4대 1에서 지난해에는 22.2대 1까지 치솟았다. 사법고시의 평균 경쟁률 10~15대 1보다 높다. 삼성에 합격하기란 바늘구멍보다 더 좁은 ‘나노 구멍’이다. 올해도 지난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개개인의 숨어있는 잠재능력을 발굴하라”
삼성그룹이 지난 1995년 처음 도입한 SSAT는 ‘열린 채용’을 지향점으로 ‘현재의 상태’를 평가하기보다는 잠재력 평가를 통한 ‘발전 가능성’과 ‘성장 가능성’ 위주로 신입사원을 뽑겠다는 뜻을 실현하기 위해 시작됐다. 1957년 국내 최초 신입사원 공개채용 도입 1993년 국내 최초 여성공채 도입, 1994년 채용의 학력 철폐에 이은 삼성 인사 정책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인재의 좋고 나쁨은 학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가진 잠재능력에 있다”며 “학력에 상관없이 뽑고 능력을 발휘하면 대졸 사원과 동등하게 대우하라”고 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지시로 만들어진 SSAT는 운용 과정에서 수차례 개정 또는 변화를 시도하며 20년째 삼성 입사의 등용문으로 자리를 굳건히 해왔다.
SSAT는 삼성그룹의 위상을 키우는 데 큰 몫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SSAT 시행 후 삼성은 다른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1990년 후반 IMF 외환위기, 2000년대 초반 벤처 거품 붕괴, 2008년 글로벌 외환위기 등 외부 충격을 받았으나 성장 곡선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삼성그룹 차원의 끊임없는 인재경영이 한 몫했다. 한 명의 인재 확보에 성공하면 그 인재 때문에 또 다른 인재를 구할 수 있다. 이렇게 한 명 한 명 인재가 모이다 보니, 위기에서도 생존을 넘어 성장하는 방법을 발굴할 수 있었다.
◆“5년 후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하는 신입사원
하지만 ‘열린 채용’의 상징인 SSAT는 삼성이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심화시켰다. 삼성그룹은 학력 철폐와 SSAT를 도입함으로써 학력 중시의 인습과 폐해에 따른 사회 병리적 현상을 치유해 ‘간판주의’와 ‘과외지옥’ 등 입시경쟁 위주 교육체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삼성직무적성검사 관련 서적만 50여 종에 이르고 사설학원에 개설된 관련 강의도 성황을 이룬다. 대학에서도 자체적으로 특강이나 모의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창의력을 검토하겠다는 SSAT가 결국 족집게 과외 도구로 전락했다.
학력 철폐는 삼성 집중화 현상을 더욱 고착화했다. 삼성 입사를 위해 임시로 다른 직장에 다니며 SSAT를 치루는 재수생, 삼수생이 늘었으며, 신입사원 중 10~20%가 다른 회사에 근무했다는 통계도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총장 추천제와 SSAT의 응시자격 제한 등의 도입은 단순히 SSAT의 시행에 드는 100억 여원의 비용을 줄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한 해에 삼성이 인재에 투자하는 돈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100억원은 사실 푼돈에 가깝다”며 “다양한 인재들이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해 능력을 마음껏 펼치고 그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받는 사회가 되지 못하다 보니 삼성 입사 집중화 현상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20만명의 SSAT는 삼성의 인재 선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섰다. 특히 이들이 삼성 때문에 투자하는 비용의 규모를 생각해야 한다. 국가적으로도 낭비다. 삼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솔루션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할 때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뚫고 들어왔어도 삼성에서 인생의 꿈을 이루겠다는 직원들의 수가 적다는 것이다. 입사 문을 뚫기 위해 몰려드는 인원이 많은 기업이 삼성이지만, 그만큼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기업 또한 삼성이다. 2013년 3분기 분기 보고서 기준 삼성전자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9.1년에 불과하다.
삼성전자에서 사업부문 사장을 역임한 한 인사는 “현역시절 삼성전자에 입사한 신입사원들과의 대화에서 5년 후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는 이들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최고의 직장이라는 삼성전자에 들어와서 개인의 앞날을 걱정하다니”라며, “끊임없이 채용제도를 개선하며 삼성에 맞는 인재라고 뽑았지만, 회사의 바람과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회사에 맞는 인재를 뽑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구나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