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역일꾼에서 억만장자로…위펑녠의 '인생역전'

2014-01-1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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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펑녠 회장과 워런 버핏. [사진=위펑녠 화보집]


아주경제 배상희 기자 = 중국에서 '자선사업계의 노벨'로 불리는 위펑녠(餘彭年) 회장은 지금의 명성을 얻기까지 50년간 사업가로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부동산 개발업과 호텔업을 통해 노역일꾼에서 억만장자로의 인생 역전을 이뤄냈다. 그가 부동산 개발사업과 호텔 경영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은 30억 홍콩달러(약 4124억원) 이상이다. 하지만 위 회장은 부에 연연하지 않고 저명한 자선사업가로서의 인생 제2막을 열며 '공수래 공수거'의 의미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 '부동산'으로 일어선 사업가

후난(湖南)성 출신의 위펑녠은 대학 졸업 후 창업의 꿈을 안고 홀로 상하이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그는 기자, 환경미화원, 잡역부, 노점상, 인력거꾼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며 힘겨운 청년시절을 보낸다.

1950년대 후반 홍콩으로 건너간 그는 문화와 언어 차이 등 사회적 장애물에 또 한 번 부딪치게 되면서 변변한 직업을 구하지 못한 채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모은 밑천으로 부동산 개발업과 여행업에 뛰어들며 진정한 사업가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위펑녠은 한때 주식투자로 2000만 위안(약 35억원)에 달하는 재산의 대부분을 잃는 큰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주식투자 실패 이후 자신이 가장 오래 몸담았던 부동산사업으로 복귀하게 되고, 홍콩 부동산시장에서 또 다시 재기의 기회를 찾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자금 전부를 투자해 홍콩에 위치한 중국 영화배우 리샤오룽(李小龍)이 살던 1000여 평방피트의 호화저택을 구입했고, 이후 주택의 가격이 7000만 위안(약 123억원)까지 급등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사업가로 일어선다.

이후 위펑녠은 보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자금을 선전(深圳)에 집중투자하기로 결심하고 선전시 루어후(羅湖) 상업중심구에 57층의 5성급 호텔인 지금의 펑녠(彭年)호텔을 세우게 된다.

이와 함께 그는 홍콩 위안랑보아이(元朗博愛) 대표, 푸더(富得)발전유한공사 이사장, 위안창(元昌)부동산유한공사 CEO 등을 역임하며 사업가로서의 입지를 굳혀간다.

◇ 인생 최종의 꿈은 '영원한 자선가'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의 이름 세 글자를 빛내주는 수식어는 자선사업가 위펑녠이다. 그가 자선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과거 기자직을 하면서 빈곤계층 사람들의 힘겨운 생활을 목도하면서부터다.

위펑녠 회장은 1980년대부터 국내에서 자선사업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고향 재건에 깊은 관심을 갖고 펑리산창사(彭立珊長沙)복지기금회를 설립하는 등 1981년부터 고향 후난 자선복지사업을 지원하는 데 앞장선다. 2003년부터는 백내장 환자를 돕기 위한 '광명(光明)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위 회장은 2004년 펑녠호텔의 재산 경영을 전문재산관리위원회에 맡기고 이곳에서 나오는 모든 이윤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공언하며 펑녠호텔 이사장직을 내려놓았다. 올해로 92세를 맞은 위펑녠 회장은 현재 일반 자선사업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자선은 아무리 많이 해도 여전히 부족한 것"이라는 그의 말 속에서 '공수래 공수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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