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심의제가 등급제로 바뀌면서 영화감독들은 표현의 자유를 얻었고 무한 상상력이 가미된 다양한 소재가 영화화 됐다. 국내영화는 매니아들만 보는 그저그런 수준이라고 폄하했던 관객들도 선택의 폭이 다양해진 한국영화에 열광하며 극장 예매소앞에서 줄을 서거나, 예매 사이트를 다운시키는 정성을 마다하지 않았다.
콧대 높던 해외의 초대형 영화 제작·배급사들이 한국에 먼저 진출하고, 한국 감독, 모델과 손을 잡고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한편, 이제는 최신작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하고 있다.
창조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검열’이다. 사전심의가 낳은 폐단은 정부가 내세운 부당한 사전심의 기준보다 “이거 하면 어차피 걸리겠지?”라는 자기검열이 더 컸다.
FKI미디어가 지난달 발간한 ‘한국형 창조경제의 길’에는 창조경제의 8가지 성공조건으로 △거시경제의 안전성 △창조적 인력의 확보 △지적재산권보호 △공공정보의 공유 △융합·통섭의 연구·개발·사업화, 인프라 구축 △창업금융의 원활한 작동 △대·중소기업 상생구조의 정착 △창의력 저해하는 규제철폐 등을 들었다.
이 가운데 규제철폐는 한국형 창조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생명줄인 ‘자율성’을 키워나가기 위해 반드시 파괴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의 규제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각국의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은 2012년 세계 19위에 올랐다. 그런데 정부 규제에 대한 부담은 2009년 98위에서 지난해에는 오히려 117위로 떨어졌다.
정부의 칸막이식 규제와 기준 미비로 인해 산업계가 시장 선점에 실패한 사례는 넘쳐난다.
머리카락 굵기의 1만분의 1 수준, 즉 1m의 10억분의 1의 세계를 다루는 나노기술의 파급 효과는 생활필수품과 가전, 인공장기, 국방 무기까지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나노기술을 이용한 산업은 ‘은나노’ 세탁기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다. 수요가 없다는 점 보다 정부 규제 때문에 시장을 창출하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나노산업에 대한 제대로 된 기준을 제시하지 않아 사업화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국내 가전업계는 항균효과가 뛰어나다고 알려진 은나노를 활용한 세탁기와 TV, 모니터 등 관련 제품을 8년전부터 개발했다. 하지만 일각에서 나노물질의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하자 정부는 개선방안 대신 생산중단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부가 이를 충분히 감안해 제대로 된 기준을 마련했다면 한국의 나노기술은 지금보다 몇 단계 더 발전하고 활용도 또한 높아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 나노입자를 활용해 노화방지 효과가 있는 화장품을 개발한 한 기업은 선뜻 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와 정보통신기술(ICT)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한 한국은 정작 두 개의 기술을 결합한 원격진료 부문에서도 열세를 보이고 있다. 원격진료가 국내에선 사실상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02년 원격진료의 개념을 의료법에 도입했으나 사실상 활용이 불가능한 규제를 붙여놨다. 예를 들어 의사와 의사간 원격진료는 가능하지만, 환자와 의사간 원격진료는 안되며, 농어촌에 있는 노인들이 원격진료를 받으려면 그 지역에 있는 의료진이 반드시 개입돼야 하는 식이다. 전자의무기록도 반드시 병원내에 두도록 해 의료정보를 인터넷으로 주고받는 것 자체가 금지됐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본부장은 “우리나라의 법과 제도는 정하고 있는 것만을 허용하고 그 외에는 모두 금지하는 ‘원칙금지방식’(Positive System)이어서 아무리 좋은 창조상품, 서비스를 개발하더라도 법에서 정한 것이 아니면 지원은 물론 인증을 받기도 힘들다”며 “서비스업만 보더라도 전체 업종의 67.4%가 법적 진입장벽을 갖고 있는데, 영화산업의 선례를 참조해 법에서는 안되는 것만 정하고 그 외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방식(Negative System)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