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쉰은 1978년 4월에 광둥성 서기로 임명돼 1980년 11월까지 광둥에서 근무했다. 그는 2년8개월의 기간동안 중국의 개혁개방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매체는 평가했다. 그는 우선 광둥성에 도착해 문화대혁명의 과오를 바로잡는 작업을 시작했다. 특히 1929년 상하이에서 기의하며 중국혁명에 공을 세웠던 펑바이(彭湃)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를 단행했다.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중국 농민운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던 펑바이였지만, 그는 문혁기간동안 반동으로 몰렸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160명이 사망했고 3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는 참화를 당했었다. 이를 통해 문혁에 대한 수습작업을 마무리한 후 그는 경제건설작업에 매달렸다.
1978년 7월 시중쉰은 바오안(寶安)을 시찰하면서 선전(深圳)과 홍콩의 경제력의 차이가 막대함을 목도하고는 일단의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해 11월 중공중앙공작회의에 참석한 시중쉰은 "광동에서 보니 개혁개방이 시급하다"며 "중앙이 광둥에 더욱 큰 지원을 해주고, 지방에 재량권을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홍콩, 마카오 등지의 화교자본을 유치하고, 선진설비와 기술을 받아들이고 전기를 들여온다면 시범적으로 경제를 개발시킬 수 있고, 인재를 배양하며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78년 12월 11기3중전회가 개최된 이후 시중쉰은 예젠잉(葉劍英) 원수에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해 그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1979년4월 시중쉰은 베이징의 중앙공작회의에 참석해 "중앙정책의 유연성을 발휘해 광둥성에 특구를 조성하자"면서 "선전,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를 묶어 개혁개방의 시범기지로 삼자"며 구체적인 안을 제출했다. 특구를 조성해 화교자본과 외자를 끌어들여 경제개발을 이뤄내자는 게 요지였다.
이어 5월에는 구무(谷牧) 국무원 부총리가 시찰단을 이끌고 광둥성을 찾았으며, 7월 당중앙과 국무원은 정식으로 선전과 주하이의 일부지역에 특구를 조성할 것을 승인했다. 이후 특구건설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선전특구는 아직까지도 중국의 개혁개방1번지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매체는 시중쉰의 이같은 조치가 G2로 올라선 중국의 현재 국력을 낳았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