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흥 중국총괄부회장이 정몽구 회장과 기아차 중국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
현대기아차 상용 중국합작 조인식 |
아주경제 김형욱 기자= 중국 당국이 올 초 내놓은 새로운 법규를 보면 ‘중국 지분 51% 이상의 중국 기업에 요소 부품을 맡겨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하나도 없다.” 이기상 현대차 자동차연구개발총괄본부 상무는 ‘2012 춘계 자동차부품산업발전 전략 세미나’에서 당시 중국이 내놓은 새 정책에 대해 이같이 평했다. 이 상무는 “일부러 모호하게 만들어 각 업체들의 대응 정도를 보고, 포괄적인 개념으로 끌고 가려는 배경이 있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견해”라고 부연했다.
1990년대 말 현지 법인 설립을 주도한 경험이 있는 한 국내기업 관계자는 “현지 기업과의 합자법인 설립부터 공장을 짓기 위한 부지 선정, 공장 가동 후에도 온갖 문제가 당국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측면이 컸다. 관계 정도에 따라 안 되는 것도 될 수 있고, 당연한 것도 안 될 수 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지금은 그 때에 비하면 상당히 체계를 갖추고 있으나, 자국기업 보호 등이 걸린 문제 등에선 여전히 관계, 인맥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현대기아차도 예나 지금이나 중국 사업에 있어 ‘관시’가 중요하기는 마찬가지다. 1990년대 말, 본격적인 중국 사업을 추진하면서부터 시작된 중국 내에서의 관계 설정이 이후의 성공 밑거름이 됐다.
1999년 그룹 중국사업담당 고문으로 위촉된 설영흥 중국 총괄 부회장은, 2002년 베이징자동차 경트럭 공장 인수와 함께, 베이징 시정부의 반대에도 기존 직원 4800명을 퇴직시켰다. 1500만 달러란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평균 나이를 50세에서 25세로 낮춰 생산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또 50대 50 합자법인에서 동사장(이사회 회장)은 중국 측이, 총경리(CEO)는 한국 측이 맡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시스템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경영은 올 1월 승진한 백효흠 베이징현대 총경리(사장)와, 소남영 동펑위에다기아 총경리(부사장)이 각각 전담하고 있다.
설 부회장은 지난 2010년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시작이 반’이란 말은 중국에서 통하지 않는다. 시작이 전부”라고 했다. 또 “많은 자동차 회사들이 경영 마찰로 삐걱거리고 있지만 현대는 달랐다. 이 같은 명료한 리더십 체계가 ‘현대속도(現代速度)’란 신조어를 만든 원동력”이라고 덧붙였다. 현대차는 2002년 10월 중국 정부의 공장 건설 승인 후 2개월 만인 그 해 12월 2000대의 EF쏘나타를 생산했다.
이 일련의 과정은 1994년 현대정공 고문으로 중국 사업을 주도한 화인(華人)인 설 부회장의 ‘관시’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몽구 회장과의 오랜 인연으로 중국 사업의 전권을 위임 받은 그는, 2002년 당시 베이징시 서기던 자칭린(賈慶林)과 10년 넘게 막역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현재 중국 최고 권력기관인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 중 한 명이자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으로 서열 4위로 꼽히고 있다.
현대차는 시 정부에 10억 달러가 넘는 세금을 내며 자 주석에 힘을 싣고, 자 주석은 이런 현대차를 후원하는 관계로 발전해 왔다. 정 회장의 중국 방문 때나 자 주석의 한국 방문 땐 서로 만나 각종 현안에 대해 논의해 왔다. 자 주석은 지난 2008년 현대차 베이징 2공장 완공, 2010년 3공장 착공 때도 참석 “현대차는 베이징 시민의 자랑”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보다 앞선 2004년에는 한국을 직접 찾아 현대차 울산 공장을 둘러보고 정 회장과 환담하기도 했다. 업계에서 삼성의 시진핑 부주석, LG의 리커창 부총리, 현대기아차의 자칭린 정협 주석으로 불리기도 한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
포스트 후진타오 시대 준비도 ‘착착’
설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현대기아차의 ‘관시’는 비단 자칭린 주석에 그치지 않는다. 왕치산(王岐山)ㆍ장더장(張德江) 국무원 부총리, 리위안차오(李源潮) 당 조직부장 등 중국 당에 넓은 인맥이 있다. 이들과의 호혜(互惠) 관계가 향후 현대차의 사업에 힘을 실어 주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지난 2008년 이래 4년에 걸쳐 진행 중인 황사 발원지인 내몽고 차깐노르 호수의 사막화ㆍ생태계파괴 방지 프로젝트 ‘현대그린존’도 중국 3위 자동차 기업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자는 취지에서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 결과 3800만㎡에 달하는 면적이 초지로 바뀌게 됐다. 기아차 역시 지난해 쓰촨성 대지진 피해지역을 돕기 위한 ‘기아 빌리지’ 사업을 진행해 왔다. 현대차그룹은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중국기업사회책임포럼에서 2년 연속 ‘중국 12대 사회책임 기업’으로 선정(2011~2012년)되기도 했다. 한국기업으로는 유일한 수상이다.
다만 현재 중국 정치는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7월 23일 베이징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차기 주석이 유력한 시진핑(習根平) 국가 부주석, 차기 총리가 유력한 리커창(李克强) 상무부총리를 비롯한 9명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성부급(省部級) 주요 영도 간부 세미나가 열린 데 이어 올 8월 초까지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원로급 거물이 차기 상무위원의 면면을 선정하기 때문이다. 2003년 시작된 후진타오 시대가 가고 시진핑 체제로의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은 공산당의 1당 독재지만 사실상 3개 파벌로 나뉘어 있다. 후진타오 현 주석을 주축으로 한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과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상하이방, 쩡칭훙(曾慶紅)의 태자당. 현재 야당 격인 상하이방과 태자당이 협력하고 있는 가운데 공청단과 대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왕리쥔 충칭시 부시장의 폭로 불거진 보시라이 충칭시 서기(태자당)의 비리 사건 역시 이 같은 힘싸움의 여파란 분석도 있다.
8월 현대차 중국 베이징 3공장과 2014년 상반기 기아차 옌청 3공장을 연이어 가동해야 하는 현대기아차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올 6월에는 태자당 소속인 왕치산 국무원 부총리가 여수엑스포 참석차 방한했을 때, 정몽구 회장과 만나 중국 정부와 현대차그룹의 파트너십을 재차 확인했다. 3개 파벌 중 상대적으로 연결고리가 적은 태자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것이란 게 중국 현지 관계자의 분석이다. 자칭린 주석은 상하이방 소속이다.
올 1월에는 공청단과의 결속을 다지는 기회도 가졌다. 공청단과 함께 현대그린존ㆍ기아빌리지 등 중국 내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친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은 것. 또 공청단 산하 중국청년창업취업기금회에 매년 1000만 위안(약 18억원)을 기부하는 것을 비롯해, 오는 2016년까지 매년 2000위안, 총 1억 위안(180억원)을 중국 사회공헌 사업에 기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공청단은 이미 현대기아차와는 적잖은 인연이 있다. 단체 대표 격인 제1서기가 지난 2003년부터 베이징 부시장을 맡고 있는 루하오(陸昊)다. 그는 2008년 현대차 베이징 2공장 준공식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역시 공청단 출신인 리위안차오 당 중앙조직부 부장도 지난 2002년부터 장쑤성 서기를 맡으며 2005년의 기아차 옌청 2공장의 착공 행사에서 정 회장과 설 부회장과 환담한 바 있다.
한 중국 소식통은 “오는 2016년 174만대 이상의 중국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되는 현대기아차에 있어 중국의 새 권력의 방향은 향후 경영 활동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초미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며 “향후 권력에 대해 다양한 추측이 나오고 있지만, 현재 국내 기업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현대기아차와 같이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 두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