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의 가난한 농가에서 7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난 박 변호사는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해 경기고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를 반대하는 교내시위에 나섰다가 투옥된다.
4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학교에서도 제명된 그는 출소 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해 독학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했고, 1980년 합격해 대구지검에 검사로 임용됐다.
그러나 “검사라는 직업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6개월 만에 사표를 낸다.
그는 변호사 개업 후 1986년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부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을 맡으며 인권변호사로 활약한다.
인권변호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그는 조 변호사가 별세하자 1991년 돌연 유학길에 올랐다.
영국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1994년 참여연대를 만들어 한국의 시민운동의 새역사를 써내려간다.
‘1인시위’라는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들어냈고, 소액주주운동과 총선 낙천·낙선운동을 펼치면서 정치권과 재벌의 개혁을 주도했다.
2000년에는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설립해 기부문화 확산에 앞장 섰으며, 2006년 아이디어로 사회혁신운동을 펼치는 희망제작소를 만들었다. 권력의 감시자에서 분배 전도사로 주활동 반경을 변경한 것이다.
2007년 17대 대선 당시 범여권(노무현 정부) 후보로 거론되던 박 변호사는 지난달 중순 서울시장 보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5% 내외의 낮은 인지도로 시작했지만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아름다운 양보’를 이끌어내면서 유력 야권 주자로 발돋움한다. 이후 민주당, 민주노동당 후보와 단일화 경쟁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면서 범야권 단일후보로 보선에 나선다.
민주당의 ‘입당 러브콜’에도 묵묵히 시민후보를 자처하며 무소속으로 선거전에 임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지원한 나경원 후보를 제치고 승리했다.
소외된 시민을 보듬고 ‘소통’과 ‘공감’의 시정을 펼쳐나가겠다는 박 당선자의 앞으로 어떤 서울시정을 만들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