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핑 관제묘 |
(아주경제 김희준 홍우리 기자) 밤 사이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있었다. 어슴푸레하게 깔린 안개속을 뚫고 우리는 관우의 생가로 향했다.
윈청(運城)시에서 서남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창핑(常平)촌. 윈청시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지나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리는 취재진의 차가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지난 8일 동안 계속된 비에 가뜩이나 좁고 낡은 도로의 노면이 심하게 패어 있었던 것이다.
무신(武神)이자 재물신(財物神)으로 불리는 관우, 신비로운 비밀을 간직하고 싶은 생각에 그토록 많은 비를 뿌렸던걸까. 젖은 옷을 걸치고 질퍽거리는 길을 따라 관우 생가로 가는 도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날 찾아간 셰저우(解州, 解는 셰저우로 발음)관제묘가 중국 내 최대 규모, 최고의 보존 상태를 자랑한다면 창핑관제묘는 관우의 생가 터에 지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중국 전역에 걸쳐 생긴 관제묘의 발원지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하는 안내원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많은 문화재들이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핑관제묘는 비교적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뜻있는 현지 주민들이 기세 등등했던 홍위병들에 온몸으로 저항해 지켜냈다니 죽음을 불사했던 충신 관우의 후손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창핑 관제묘 입구, 관왕고리라고 쓰인 석패방. |
창핑관제묘 입구에는 ‘관왕고리(關王故里)’ 네 글자가 써진 편액이 걸려 있다. ‘관우의 옛 마을’이라는 뜻으로, 관우는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 이 곳에서 태어나 19년을 지냈다. 이 때문에 관공가묘(關公家廟)라고 불리기도 한다.
백성을 괴롭히던 토호를 죽이고 도망길에 오른 뒤 두번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었던 관우였지만 고향은 그를 잊지 않았다. 관우 사후 언제부턴가 마을 주민들은 관우의 충절과 덕을 기리고자 주인을 일은 집 터에 작은 사당을 지었다. 이후 금(金)나라 때 이르러 사당으로서의 일정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고, 명(明)대와 청(淸)대를 거쳐 보수·확장되며 지금의 규모로 확장된 것이다.
고대 문헌에는 명나라 가정(嘉靖) 34년(1555년) 이후에만 16차례 이상 증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취재진이 창핑 관제묘를 찾아갔을 때는 마침 관공문화여행절 기간이었다. 덕분에 전통복장을 한 공연팀의 관우 기념의식도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가 관제묘에 도착했을 때,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공연팀은 공연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염호를 가리키는 뜻의 '영종차해'가 적힌 패방. |
입구를 들어서면 좌우에 각각 수육조산(秀毓條山)과 영종차해(靈鍾鹾海)라고 쓰인 패방이 서있다. 수육조산은 관제묘 부근에 있는 중조산(中條山)을, 영종차해는 창핑촌 북쪽의 염호(鹽湖)를 가리킨다. 이 여덟 글자는 산과 호수로 둘러쌓인 창핑촌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풍수학적으로도 살기좋은 곳임을 의미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불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의리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긴 관우의 성격은 염호와 인접해 있는 지리적인 특성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당시 소금의 가치는 상상이상이었습니다. 소금은 주요 수입원이자 세금원이었기 때문에, 염호는 마을 제1의 재산이었죠. 탐관오리의 횡포를 막고 소금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결과 의리가 중요했고, 이러한 환경이 관우 성격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패방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게되는 벽돌탑은 관우 부모를 위한 탑으로, 조택탑(祖宅塔)이라 불린다.
19세의 관우가 악덕 지주를 죽이자 관리들은 본보기로 삼기 위해 관씨 성(姓)을 가진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관씨 성 사람들은 살기위해 하나 둘 마을을 떠났지만 힘든 피난길을 가기에 관우 부모는 너무 연로했다. 결국 아들에게 짐이 될까 두려운 노부부는 집 앞마당에 있던 우물에 몸을 던졌다. 이후 관우 사당이 조성되며 관우를 향한 마음은 그 부모에게까지 닿았고 당시 우물이 있던 자리에 탑이 세워진 것.
동한(東漢)시대 탑이 처음 만들어 질때는 낮은 흙탑이었으나 관우의 사후 신분 상승과 함께 탑의 높이도 높아졌다. 금대에는 흙탑 바깥에 벽돌탑을 쌓았고 청대에 이르러 오늘 날 7층 건물에 맞먹는 높이가 되었다고 한다.
숭녕전 앞에 마련된 제사 공간 헌전(獻殿)은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피워둔 향 냄새가 짙었다. 한 부녀가 제대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채 간절한 모습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소원을 빌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고 딸이 수줍게 답했다.
자신은 현재 유학 중이라 자주 못오지만 고향에 올 때면 아버지와 꼭 이 곳을 찾는다고 했다. 한 발짝 뒤에서 딸의 이야기를 듣는 아버지의 얼굴이 미소로 빛났다. 아마도 아버지는 딸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주 찾아와 딸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황제 의복을 갖춘 숭녕전 관우상. |
숭녕전 뒤로 난 통로의 끝에는 일반 황궁의 후궁에 해당하는 침궁이 자리잡고 있다.
침궁 입구 태자전에는 관우의 아들 며느리 상이 모셔져 있다. |
통로에 들어서면 좌우에 ‘태자전(太子殿)’이 있는데 오른쪽에는 맏아들과 맏며느리, 왼쪽에는 둘째 아들과 둘째 며느리의 상이 모셔져 있다.
낭낭전에 있는 관우 부인의 모습. |
안쪽 가운데에는 관우 부인 호씨의 상을 모신 황후전, 이른바 ‘낭낭전(娘娘殿)’이 있다.
관우가 고향을 떠난 뒤 호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중조산에 올라 약초를 캐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호씨는 마을에서 이름난 명의가 되었고, 장성한 두 아들이 고향을 떠나 관우와 재회할 때도 호씨는 중조산에 남았다고 한다. 호씨 또한 사후 약신이자 삼신할머니가 되어 후대를 보살핀다고 전해진다.
“이 곳 관제묘는 관우가 실제로 태어나고 자란 생가의 터 위에 지어졌습니다. '진짜 집'인만큼 관우의 부인과 두 아들을 위한 공간도 따로 마련돼 있죠. 또한 황제로 승격된 만큼 관씨 시조를 모신 성조전(聖祖殿)도 세워졌습니다"
관씨 시조를 모신 성조전. |
시조부터 부인, 두 아들 내외까지 함께 모여있는 창핑 관제묘. 춘추루(春秋樓)가 셰저우관제묘의 ‘백미’였다면, 창핑관제묘의 매력은 침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관우와 지아비를 떠나보낸 관우 부인의 영혼이 이 곳에서 다시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진짜 집'에서만 가질 수 있는 안온함이 느껴졌다. 중국 전체 관제묘 중 낭낭전과 숭조전, 태자전까지 마련된 곳은 이 곳이 유일하다고 현지 관리인은 소개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전장에서의 기백과 추상같은 위엄이 넘치는 명장 관우가 아닌 인자한 아버지로서의 관우를 상상하며 우리는 다음 삼국지 무대로 발걸음을 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