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하이신구는 1984년 개발이 시작됐으며 당시 컨셉은 항만을 중심으로 한 물류중심지였다. 하지만 톈진 출신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수장으로 하는 국무원이 2003년 출범되면서 빈하이신구 개발계획은 스케일을 키워 입안되기 시작됐다. 이후 2005년에 국무원이 빈하이신구를 ‘국가종합개혁시험구’로 지정하면서 개발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2009년 기존의 탕구(塘沽)구, 다강(大港)구, 한구(漢沽)구를 통합해 현재의 빈하이신구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개편했다. 황싱궈는 중앙정부와 긴밀한 협력을 통해 2008년부터 3년간 10개부문 18개 조항의 특별지원을 얻어냈다. 그리고 각종 규제철폐도 관철시켜냈다. 황싱궈는 “우리는 외국 기업들에게 자녀 교육ㆍ의료ㆍ주택 등 좋은 서비스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노력했다”려 “빈하이신구는 국내외 기업 구분없이 입주 기업에 대해 세제혜택 등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투자 규모에 따라 토지공급 또한 싼 값에 받을 수 있도록 했고 투자 유치에 공을 세우면 공무원은 파격 승진하고 민간인에겐 금전적 인센티브가 주어지도록 했다. 톈진항의 자유보세구역도 빈하이신구에서 생산하는 물품을 신속하게 수출하도록 도와준다. 또 지자체 차원에서 협의체를 구성해 원스톱 행정 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빈하이신구는 개혁개방 제1세대의 선전경제특구와 2세대인 상하이(上海) 푸둥(浦東)신구의 성공 이후 중국이 내세우는 새로운 지역경제개발모델인 것. 2270㎢면적으로 서울(605㎢)의 3.75배 크기다.
톈진시는 2020년까지 빈하이신구의 기본적인 기반시설을 마무리해 첨단산업과 환경이 어우러지는 생태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국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작년까지 유치한 외자는 72억2000만달러(약7조9400억원), 내자는 352억위안(59조8400억원)이나 된다.
황싱궈 시장은 최전방에 서서 빈하이신구에 투자를 모집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황싱궈(黃興國) 톈진시장은 “빈하이신구는 베이징과 칭따오(靑島) 따롄(大連) 등 반경 500km 이내에 인구 100만 이상 도시가 11개 있는 환발해(環渤海)경제권의 핵심”이라며 “중국 내수를 겨냥한 외국기업에게 아주 좋은 투자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1954년10월 저장(浙江)성 샹산(象山)현에서 태어난 황싱궈는 1972년 공청단을 통해 사회에 진출한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샹산현 샤오탕(曉塘)인민공사 공청단 서기였다. 이후 1973년 공청단 샹산현 부서기를 지냈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된 이후 그는 샹산현의 또다른 인민공사에서 서기를 지내며 이 기간동안 저장성 당교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 기초이론을 전공한다. 1982년에는 샹산현 선전부장을 지냈고 1985년에는 샹산현 서기에 오른다.
이후 1989년 저장성 타이저우(台州)지역의 서기를 지냈고 1996년 저장성 인민정부 비서장으로 승진한다. 이후 1998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을 저장성 부서기 겸 닝보(寧波)시의 서기로 근무한다. 이기간에 그는 통지(同濟)대학에서 공상관리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한다.
특히 그가 부서기이던 2002년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이 저장성 서기로 부임해 왔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2년여동안 시진핑과 손발을 맞췄다. 황싱궈는 당시의 인연으로 아직까지도 시진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는 2003년 톈진시 부서기로 이동해 오게 된다. 그리고 2007년 인민은행 행장을 지낸 다이샹롱(戴相龍)의 후임자로 톈진시장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