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내국인면세점을 싼야로 끌어온 데는 뤄바오밍(羅保銘) 현 하이난성 서기의 공이 크다. 그는 톈진(天津)사람으로 2001년 하이난 부서기로 이동해와서 11년째 하이난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이난성의 관광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앞장서 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010년 중국 국무원은 오랫동안 뤄바오밍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건의안을 받아들여 하이난 섬을 국제적 여행단지로 지정해 개발사업을 추진토록 했다. 하이난성 정부와 중국 상무부는 그해 3월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정치협상회의’에서 성과 부처 대표들이 합작사업을 추진할 방안을 통과시켰다. 뤄바오밍 당시 하이난성 성장은 “해외자본을 유치해 대형 농산품교역센터를 건설해 대규모 회의 및 전시업무를 추진하고 하이커우 종합보호관세지역 통관사업을 하이난성과 연계해 개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하이난섬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의 하나가 될 것”이라면서 “발전 잠재력이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2011년 3월 뤄바오밍은 5월1일 내국인용 면세점 개장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는 “구매한도액을 5000위안으로, 2년에 2회로 확정했다”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5000위안이 초과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향후 세금 우대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전했다.
중국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섬인 하이난성은 제주도 면적의 약 18배다. 항구를 이용한 발전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중국 정부가 아세안 국가들과 교역 강화를 위해 개발 중인 양푸(楊浦)항은 하이난 특구 안의 특구로 손꼽히며 개방을 선도하고 있다. 보세구역, 수출가공구역 등 특수 개방구역의 모든 우대 정책이 중첩돼 있는 양푸 항은 중국 4개의 보세항구 중에 보세 정도가 가장 높다.
양푸 보세항구의 면적은 9.2㎢에 달하며, 투자금액도 50억위안(6000억원)에 이른다. 뤄바오밍은 “하이난 성은 전력으로 양푸 항구 건설을 진행하고 높은 수준의 계획, 높은 수준의 건설, 높은 효율의 운항을 실행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하이난의 항해권 역시 대폭 개방됐다. 뤄바오밍 성장은 “항공권 개방에 있어서 큰 도약을 했다”며 “최초로 개통된 영국의 맨체스터 직항선을 포함해 러시아 한국 일본 등 중점적인 여행 항공시장의 항공기들이 하이난으로 직항하게 됐다”고 밝혔다.
뤄바오밍의 경제분야 실적은 뛰어나다. 하이난성의 GDP는 2007년 1229억위안에서 2008년 1459억위안, 2009년 1646억위안을 거쳐 2010년 2052억위안을 기록했다. 이중 서비스산업인 3차산업의 GDP는 2007년 484억위안에서 2010년 947억위안으로 두배가까이 뛰었다. 내국인 관광객은 지난해 2521만명을, 해외관광객은 66만명을 기록해 관광총수입은 257억위안이었다. 1인당평균 GDP 역시 2007년 1만4631위안에서 2010년 2만3644위안으로 늘었다. 이 같은 성과를 배경으로 뤄바오밍은 2011년 8월 웨이류청(衛留成)의 후임으로 하이난성 서기에 올랐다.
1952년10월 톈진(天津)에서 태어난 뤄바오밍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9년 네이멍구(內蒙古)로 하방돼 생산건설현장에서 노동을 한다. 1973년 톈진으로 돌아와 무선전부속품 제3공장에서 일했으며 문혁이 종료된 이후 대학입시를 거쳐 1978년 톈진사범전과(專科)학교 중문학과에 진학했다. 1981년부터 3년동안 톈진시 공청단 청년자원공작팀 간부를 지냈으며 1985년부터 1992년까지 톈진시 공청단 서기로 활동했다. 이 기간동안 그는 지역 명문인 난카이(南開)대학에 진학해 명청사를 전공한다. 1992년 그는 톈진시 다강(大港)구로 자리를 옮겨 부서기, 구장, 서기 등을 역임한 이후 1995년 톈진시 상업위원회 주임을 맡게 된다. 2001년 톈진시 선전부장을 끝으로 그는 고향을 떠나 하이난성으로 부임해가게 된다. 2007년에 하이난성 성장에 올랐으며 2011년 서기로 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