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투병하느라고 6년간을 더욱 외롭게 살았다. 2004년 3월 위암수술을 받은 후 대상포진, 뇌경색, 폐렴을 앓았고 대퇴골 골절 수술을 받는 등 중환자실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가족들의 고생도 막심했다. 정성을 다하던 아내가 뇌졸중으로 먼저 갈 정도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타계한 이튿날인 2009년 8월19일, 서울 강서구 등촌1동 서울시니어스 '가양동 노인정에서' 쓴 일기에서 원로 역사학자이자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거목으로 꼽히는 조동걸(趙東杰.78) 국민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그의 말마따나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직을 정년퇴직한 후에는 병상에서 보낸 날이 많았으며 이 와중에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떴다.
그의 아버지는 고향 경북 영양 주실마을에서 해방 직후 1천700평짜리 복숭아나무 과수원을 꾸려나가면서 배도상이라는 사람을 관리인으로 채용했다. 3년이 지난 1949년 아버지는 배씨에게 송아지 한마리를 사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 약속을 아버지는 지키지 못하고 이내 타계하고 말았다.
조 교수는 56년이 지나 아버지의 약속을 대신 지켰다. 2004년, 이미 고인이 된 배도상씨의 아들이 고향에서 10km 떨어진 현동마을에 산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당시 송아지 한마리 값인 200만원을 부친 것이다.
2009년 12월8일 '동부이촌동 열해식당에서' 쓴 일기에 나오는 한 대목이면서 그의 저작집에 들어갈 내용 중 일부다.
춘천교육대와 안동대를 거쳐 1981년 3월 이후 1997년 8월31일까지 국민대에 봉직하다 정년퇴직한 '우사(于史) 조동걸 저술전집'(역사공간 펴냄) 20권이 발간된다.
이를 기념해 오는 3일 오후 6~8시 백범기념관 컨벤션홀에서는 전집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이번 전집은 그의 훈도를 받은 제자들인 장석흥(국민대)ㆍ한시준(단국대)ㆍ최기영(서강대)ㆍ김희곤(안동대)ㆍ박걸순(충북대) 교수 등이 주도적으로 준비했다.
전집간행위원회에서는 애초 발표 연대 순으로 전집을 꾸미기로 했지만 투병 중인 조 교수가 나중에 직접 관여하게 되면서 지방사ㆍ독립운동사ㆍ사학사ㆍ시론과 연구평론의 4개 분야로 크게 나눈 다음 이를 20개 소주제로 나누어 각 권을 꾸몄다.
조 교수 본인은 이번 전집이 제자들이 만드는 "옛날의 문집과 같다"면서도 하지만 "이제는 저술 당사자가 만년에 자기 저술전집을 정리해 편찬 간행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집에 나타난 그의 학문 이력에서 특이한 점은 지금은 근현대사 전문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그가 한때나마 고고학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 사정을 조 교수 본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1965년에 춘천교육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면서 향토사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때마침 춘천 교외인 천전리(泉田里)에서 고인돌과 선사 적석총(先史績石塚)에 대한 중앙박물관의 발굴이 시작되어 선사 고고학연구가 절로 눈앞을 가렸다. 더구나 대학에서 사학과 출신 역사교수로는 하나뿐이어서 외롭기는 했지만 역사문제는 모두 아는 척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동분서주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고인돌 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북한강 유역의 고인돌' '강릉지방의 선사사회연구' 등이 그때 만든 글이다."
조 교수는 강원도 문화재 조사과정에서 적지 않은 에피소드도 남겼다.
"그때가 삼척 울진 무장공비사건이 있던 직후라 답사 중에 간첩으로 의심을 받아 곤욕을 치렀다. 철원 토성리에서는 1개 소대의 포위를 받아 혼난 적이 있고 양양 조양리와 정선 북면에서는 간첩으로 오인되어 감금당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곳 초등학교에는 춘천교대 졸업생이 있기 마련이어서 그 제자들의 구원으로 풀려 나왔다."
장석흥 교수는 31일 "선생은 사경을 넘나드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10여 년에 걸쳐 직접 당신의 저술을 교열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추보(보충)하면서 저술 전집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이셨다"면서 "선생의 저술전집 간행은 비단 선생 개인만이 아니라 학계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