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이미호 기자) 최근 주요 미술경매 시장에서 가장 자주 그리고 고가에 낙찰되는 근현대미술 여성 작가의 작품은 뭘까. 바로 천경자(1924~) 화백의 작품이다.
남성 중심의 화단에 화려한 채색과 상징성을 기반으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한 독보적인 여성화가 천경자. 그의 작품은 해를 거듭하면서 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2003년 12월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서 '꽃다발을 안은 여인'이 2억 3500만원에 낙찰됐고, 2006년 모자를 쓴 여인'이 6억 3000만원에, 2007년 K옥션 경매에서 초원1가 12만원에 팔려 당시 최고가를 경신했다.
또 지난해 '여인'은 2억 4000만원에, 올 들어 '그라나다의 창고지기하는 여인'과 '발리섬의 소녀'가 각각 3억 5000만원, 2억 5600만원에 낙찰됐다.
특히 오는 21일 K옥션 경매에서 1976년작 '백일'이 처음으로 공개돼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2002년 5월부터 '천경자의 혼(魂)' 상설전을 열고 있다. 그의 인생과 철학,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돼 관람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보랏빛 정한, 영원의 초상, 끝없는 여정 등 총 3개의 테마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시대별로 작품의 특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나의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구상·인물화, 43×36 cm, 종이에 채색, 1977 |
특히 '백일'에도 가장 많이 쓰인 보라색은 그의 초기 작품에서 가장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색이다. 자서전 제목으로도 유명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여인의 시1'은 1970년대 이후 작품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차가운 피부와 초점 없는 눈동자, 긴 목을 가지고 있다.
1951년 한 다방에 걸렸었던 '생태'는 당시 천경자라는 존재를 화단에 강하게 각인시켜 준 작품이다.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사랑하는 동생이 폐결핵으로 죽고,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못해 이혼을 결정했던 시기였다.
그 어려운 시기에 우연히 뱀을 본 그는 커다란 유리상자에 뱀을 넣고 무서운 생명력을 섬세한 필치로 표현했다. 끔찍할 정도로 어려웠지만 이를 이겨내려는 그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혼 후 35살의 뱀띠 남자를 사랑했지만 이뤄질 수 없는 관계였다. 그래서 서른 세 마리의 뱀에 똬리를 튼 다정한 뱀 두 마리를 추가해 작품을 완성했다.
생태(生態), 구상·영모화, 51×87cm, 종이에 채색, 1951 |
두번째 테마인 '영원의 초상'은 주요 소재인 여인과 꽃을 그린 작품을 모아놨다. 유난히 스케치를 좋아하는 그는 '화병이 된 마돈나'처럼 스타지만 이면에 가려진 우울하고 쓸쓸한 모습을 담았다.
세번째 테마 '끝없는 여정'의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마치 세계일주를 한 듯한 착각이 든다. 1969년부터 해외여행을 시작해 28년간 28개국을 돌아다닌 그는 '히피', '갠지스 강에서', '푸에블로족', '존 포드 포인트' 등의 작품을 남겼다. 특히 페루 이키투스를 방문했을 때 그린 그림은 매우 인상적이다. 까마귀, 첨탑의 십자가, 지는 달, 그 앞에서 노동하는 사람들. 죽음과 삶의 허무함을 담은 이 작품은 그의 작품 가운데 상징성이 가장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미국 그랜드 캐년의 한 줄기 자락인 마뉴멘크 밸리의 '존 포드 포인트'를 그린 작품도 눈에 띈다. 존 포드는 유명한 서부 영화 감독의 이름인데, 워낙 경관이 아름다워 영화 촬영지로 자주 활용됐던 곳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거주지이자 작업실인 압구정동 한양아파트에 있는 아틀리에 사진을 볼 수 있다. 트럼프카드로 운세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는 그는 애연가로도 유명했다. 물과 아교, 동양화 원료를 수백번 독특하고 아름다운 색을 얻어내던 모습도 사진으로 볼 수 있다. 화가 뿐만 아니라 작가로도 유명한 그의 책들도 전시돼 있다.
그와 절친인 고(故 )박경리 시인이 '경자'라는 시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는 가까이 갈 수도, 멀리할 수도 없는 아찔하게 감각적인 사람이다.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그리고 정직한 생애. 하지만 좀 고약한 예술가인 그의 삶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또 오는 15일부터 서울시 조례가 개정되면서 상설전을 무료로 볼 수 있다. 문의 02-2124-8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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