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100년 DNA 6-1] 정주영, 기업가 그 이상을 꿈꾸다

2010-07-15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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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입문부터 대북 사업까지

1990년 초 ‘모험가’ 정주영은 기업가로써 이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뤘다. 그 당시 현대건설·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 등 그의 사업은 정점에 달해 있었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이미 세계 최고 조선기업이었고, 현대건설과 현대자동차도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1984년 서산 간척지(약 155만㎡, 여의도의 33배) 완공으로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던 그가 국내 제일의 농군이 됐다.

그 자신 역시 세계 100대 거부에 들 만큼 성공한 사람이었다. 아산재단 설립, 88올림픽 유치, 전경련 회장 등 각종 대외활동으로 충분한 명성도 얻고, 뭇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야말로 ‘더 이상 이룰 게 없는 기업인’이었다.

그런 그가 1992년 국민당을 창당하고 대권에 도전했다. 기업가로써 이루기 힘든 새로운 꿈에 도전한 것이다. 당시 78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

   
 
 1992년 대권 도전한 정주영(가운데) 모습. 왼쪽에 김동길 전 통일국민당 최고위원 모습도 보인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내가 대통령이 되면…” 대권 도전=
정주영은 그해 1월 통일국민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 피선, 2월 대표최고위원 피선, 3월 14대 국회의원(전국구) 당선 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준비부터 대권 도전까지 1년이 채 안 걸렸다.

하지만 그의 행보를 보면 정치 입문 만큼은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가장 큰 반대는 내부에서 나왔다. 그의 동생과 아들들은 소극적인 신중론을 폈고, 주요 임원들 역시 난색을 표했다. 당시 현대건설 회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정계 진출을 정면으로 반박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6년부터 비서로 그를 보필하고 정치 입문 후에는 ’특보’를 맡았던 이병규씨는 “1991년 말 이 문제로 고위 간부들이 난상토의를 벌이곤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정계에 입문했다. 또 창당 2개월도 안돼 본인을 포함해 통일국민당이 31석을 획득하는 등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반신반의하던 현대그룹에서도 “우리 회장님이 누구신데 계산도 안하시고 덤비셨겠나”며 전폭적인 후방 지원에 나섰다. 전국 17만명(협력사.가족 포함 150만명)의 현대그룹 직원은 울산·서산 등지서 대국민 산업시찰을 진행하기도 했다. 현대맨이 곧 통일국민당원이었다.

그의 선거 전략은 경제·통일대통령. 또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양강 앞에서 ‘양김’에 시대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나서 삼김(三金) 시대에 진저리가 난 유권자에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북한에 자유경제를 전파하겠다’는 그의 말과 현대그룹을 이끌어 온 그의 능력이 많은 유권자들에게 어필했다.

   
 
 1992년 경제·통일 대통령을 구호로 내건 정주영 대선 후보는 결국 '3김(三金)의 벽'을 넘기지 못하고 16.3%를 득표하며 3위로 낙선했다. 그는 낙선 후 한동안 정계는 물론 공식적인 경영 석상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자신이 직접 개척한 서산 농장을 곧잘 방문했다는 것이 당시 측근들의 설명이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16.3% 득표… 그리고 뼈아픈 낙선=
그렇지만 그는 결국 낙선했다. 그 해 12월 대선에서 그는 16.3%의 득표를 얻으며 김영삼-김대중 후보에 이어 3위에 오르는 데 그쳤다.

그는 그 여파로 본인은 물론 현대그룹 전체가 대선자금 조사 등으로 인해 숱한 고초를 겪었다. 그는 “실패가 아닌 시련이었다”고 말 했지만 1993년 정계 은퇴선언으로 사실상 첫 실패였다.

그는 이후 한동안 정계는 물론 경제계 활동에도 손을 뗐다. 건강도 부쩍 악화됐다. 경영에도 주요 인사 및 신사업을 제외하고는 자식 및 형제, 주요 경영인에게 맡겼다.

당시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곳은 1984년 서산간척지 완공 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던 서산농장. 이 곳은 낙선 3년 후인 1995년 완공됐다. 간척사업 착수(1980년) 15년 만이었다. 농군의 아들인 그에게 농장은 고향, 즉 출발점과 같은 곳이었다. 그는 1996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서산농장에 오면) 과거 농촌에 살아서 기분이 좋다. 옛날에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농사가 다시 그립다”고 말했다.

그가 다시 대외적인 활동에 나선 것도 이곳이 완공된 이듬해(1996년)였다. 그리고 그는 ‘대북사업’이라는 또 다른, 그리고 그의 생전 마지막 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제 2차 소떼방북에 앞서 인사하고 있는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모습. (사진=정주영 박물관)

◆소떼 500마리 이끌고 휴전선 넘다=
1998년 6월 16일 아침, 전 세계의 관심은 한국의 판문점으로 모아진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서산농장에서 키우던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싥고 직접 북으로 향했다. 이로써 그는 판문점을 육로로 통과한 최초의 민간인이 됐다.

첫 육로를 통한 북한 방문이었던 만큼 이날 준비 작업도 철저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는 게 당시 관계자의 설명. 50대의 트럭에 500대의 소를 태우는 것부터 일이었다. 전날 밤 늦게까지 소를 태우고 고사를 올리고, 농악놀이를 하는 행사를 모두 마친 건 자정이 지나서였다.

   
 
 판문점을 통과하고 있는 소떼 행렬.
그렇게 준비를 마친 뒤 16일 오전 4시 30분 서산을 출발한 소떼는 10시에 판문점을 지나 북녂땅에 들어섰다.

북한의 시골마을 아산 태생인 정주영에게 있어 소떼 방북은 금의환향이었다. 그는 전날 밤 마음이 들떠 밤잠을 거의 못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한달째 방북 일정이 미뤄지며 계속 마음을 졸이다가 방북 당일 한시름 놓았다는 게 당시 측근의 설명이다.

‘소떼 500마리 방북’은 ‘통일을 위한 첫걸음’으로 국내외에서 큰 이슈가 됐다.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미국과 중국 간 핑퐁외교가 세계 최초의 스포츠 외교였다면 정 회장의 소떼몰이 방북은 세계 최초의 민간 황소 외교”라고 평가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을 만나고 있는 정주영(가운데) 모습.
또 프랑스의 석학이자 문화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정주영 회장의 ‘소떼몰이 방북’을 “20세기 마지막 전위 예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전위예술’은 4개월 뒤 2차 501마리 소떼 방북을 거쳐 11월 18일 마침내 금강산관광으로 연결된다.

정주영은 그 후 2000년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는 등 정계에서 못 다 이룬 대북 사업을 마지막까지 이어간다. 북한은 2001년 그의 장례식에 사상 최초로 조문단을 보내기도 했다. 그가 최근 연이은 악재로 중단 위기에 놓인 대북사업을 보고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 진다. 

(아주경제 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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