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의 트렌드 브리핑] 김연아와 아저씨 세대의 행복한 블루스

2010-03-0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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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의 피겨 프리 연기가 있던 날, 험난한 세월을 통과하고 있는 대한민국 아저씨들은 엄청난 행복감에 몸을 떨었다. 인생 살면서 단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과 즐거움을 느꼈고 전혀 야하게 느껴지지 않은 피겨 연기의 감동까지 종합선물 세트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날의 감동은 이랬다.

아무 것도 안 들리고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행성의 운행과 지구 자전도 멈춘 듯 한 그 순간, 황홀경에 젖은 피겨 여왕의 우아한 몸짓만이 '악보 위의 음표처럼' 은반 위를 미끄러져 내렸다.

가슴은 콩닥콩닥, 혹시 티끌만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엉덩방아를 찧지나 않을까? 눈을 가리고 싶을 만큼 가슴 졸여지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트리플'이라는 게 어떻게 생긴 건지, 트리플 아닌 것과는 어떻게 다른 건지 모르지만 김연아가 실수없이 착, 떨어졌을 때 터져 나오던 한숨, 탄성과 감탄은 1초 뒤에나 북받쳤다.

긴장의 순간이 지나자 "아~ 끝났네. 마오하고 상대가 안돼. 이겼어, 이겼어. 금메달이야." 성급하게 내뱉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유, 내 딸도 아닌데 왜 내 가슴이 이렇게 떨리냐?" 너스레 떨던 40대 후반 아저씨는 "어... 어... 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지던 화려한 비상과 착지, 짙은 화장을 한층 고귀하게 보이게 하는 표정 연기. 피겨의 피자도 모르는 아저씨들 눈에도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던 완벽한 묘기(妙技)였다.

마침내 4분여의 숨막히는 드라마가 끝나고 흘러내리던 여왕의 눈물. 아저씨들은 공연히 흠흠 헛기침을 해대며 딴 데를 쳐다봤다. 아저씨들이 더 울컥한 건 아직도 파르르 떨고 있는 한 떨기 꽃같은 어린 소녀가 흘러 내리는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안간힘 때문이었다.

눈물을 흘릴 때 미세하게 감지되던 연아의 안면 근육 떨림이 연기할 때 긴장을 감추며 지어내던 환상적인 표정연기와 오버랩되며 감동의 쓰나미로 다가와 기어코 눈물을 훔치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잠시 후 드디어 점수가 발표되었을 때, 아저씨들은 언제 글썽거렸냐는 듯 다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최고점은 예상했지만 마오와 25점 이상이나 차이가 나다니, 놀라움에 눈이 크게 떠지고 가슴이 미어 터졌다. 밀려드는 감동과 행복감, 뿌듯함과 자긍심.

연아는 말했다. "모르겠어요. 내가 왜 울었는지..."

'그 동안 너무 힘들었다'거나 '금메달을 꼭 따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가 부담이었는데, 아! 이제 끝났구나 싶은 마음에 긴장이 풀려서 눈물이 났다' 등 할 말이 많을텐데, 연아는 이런 뻔한 신파조 멘트를 읊어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다니...

연아 덕분에 처음으로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민망한 패션의 피겨 스케이팅 연기를 감상한 아저씨들은 연아의 연기에도 감동받았지만 그녀의 이 멘트 한마디에도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진정으로 품위있는 스포츠가 바로 이 피겨라는 종목이구나, 대오각성(大悟覺醒)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휘젓기도 했다.

이 해방감, 피겨라는 스포츠가 선사해 준 이 놀라운 '빵 터짐'. 이런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살면서 언제 이런 느낌이 스쳐간 기억이 있었더라?' 아스라한 표정도 지었다.

김연아와 아저씨 세대의 행복한 조우(遭遇)였다.


10대 아이돌 스타의 팬클럽처럼 "사랑해요, 김연아! 우윳빛깔 김연아" 외치고 싶던 그 순간들... 이제 언제 돌아올지 모를 그 순간들. 아저씨들은 인생을 다시 사는 듯한 기분도 느꼈다. 이런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뜻밖에도 김종필 전 총리가 몸으로 웅변하고 나섰다.

김 전 총리는 자타공히 아저씨 세대의 대표이자 대 선배다. 정권을 두 개나 창출했고 대한민국의 정치사와 기업 역사, 스포츠 역사를 만들어 온 위인(偉人)의 반열이다. 김 전 총리는 노구(老軀)에 건강도 성치 않다. 아무나 찾아 온다고 만나는 성격도 아니며 드러내는 걸 즐기지도 않는다.

그가 오직 김연아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신문 기자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만면에 웃음을 띠며 벅찬 감동을 표현했다.

"김연아는 얄미우리만치 아름다웠다", "정상에서 사람들이 아쉬워 할 때 내려와도 괜찮다", "기업들이 나서서 세계적인 빙상경기 연습장인 김연아 콜로시움을 건립하자"

젊은 시절부터 무수한 예술가와 문화인을 후원해 온 김종필 식 '사랑해요, 김연아! 우윳빛깔 김연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연아에게 너무도 크나큰 선물을 받고 어떤 보답을 해야 하나, 우물쭈물 하고 있는 아저씨 세대들에게 아! 그거다, 답을 주는 조언(助言)이기도 하다.

아무렴, '김연아콜로시움'을 건립해야 하고 말고다. 연아를 위해서, 다음 세대를 위해서, 우리 모두의 행복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김연아콜로시움'을 건립해야 한다.

만일 기업과 정부가 경기 탓을 하며 의사결정을 미적거린다면 아저씨 세대들이 앞장서서 범국민 모금운동이라도 벌여, 연아와 연아의 친구 세대들에게 선물하듯 콜로시움 건립에 한 몫해야 한다. 하다못해 내 자식 사교육비를 줄여서 그 돈을 내도 된다. 자녀도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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