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벌키 네슬레 최고경영자(CEO) |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주식시장과 수요자들의 변심에 일일이 대응하며 기업의 전략을 매번 수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큰 시기에는 기업 가치를 다져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게 최선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3일자에서 세계적인 경기후퇴 속에 기업 가치를 창출하는 '조용한 혁명'으로 스위스 식품기업 네슬레를 이끌고 있는 폴 벌키 CEO의 성공 비결을 소개했다.
FT는 우선 벌키 CEO의 경영 비법 가운데 끈끈한 동료관계를 중시하는 '팀' 정신을 높이 샀다.
경영공학을 전공한 벌키 CEO는 지난 1979년 네슬레에 입사한 이래 30년간 전 세계 네슬레 지사에서 두루 경험을 쌓았다.
1980~1996년 16년간 남아메리카 지역의 마케팅과 영업부문을 담당했던 그는 포르투갈, 체코슬로바키아, 독일의 마케팅 총괄사장을 거처 2004~2008년 전미지역 부사장을 지냈다. 북한을 제외한 전 세계 네슬레 지사에서 쌓은 다양한 경험을 기반으로 그는 지난해 4월 CEO로 등극했다.
벌키는 이처럼 다양한 지역의 문화를 경험하면서 무엇보다 '팀 플레이'가 전 세계 직원들의 융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도 CEO의 역할을 배우는 중"이라면서도 "독단적인 경영 스타일보다는 세계 일류를 선도하는 건강식품회사로 거듭난다는 네슬레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뭉친 팀 중심의 경영 스타일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실제 팀 정신은 불황에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네슬레는 글로벌 초대형 기업들이 손실을 냈던 지난해 모두 180억 스위스프랑(약 22조7000억원)의 순익을 올렸다. 한 해 전 순익(106억 스위스프랑)에 비해 무려 69% 급증한 것이다.
그렇다고 네슬레가 경기후퇴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올 1분기 네슬레의 매출(252억 스위스프랑)은 전년 동기 대비 2.1% 감소했다. 환율과 기업 인수·합병(M&A)과 같은 외부 변수를 감안하지 않은 유기적 성장률은 지난해 1분기에는 거의 10%에 달했으나 올 1분기엔 3.8%에 그쳤다.
그러나 벌키 CEO는 브랜드 하나로 다양한 제품을 출시해 올해 네슬레의 성장률 목표치인 5%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실제 네슬레의 인스턴트커피 브랜드인 '네스카페'는 '네스카페골드' '네스카페 클래식' '네스카페 샤세트' 등 다양한 제품을 파생시켰고 가격대도 천차만별이다.
또 고급 원두커피 매니아들을 위한 '네스프레소' 머신도 준비돼 있다. 네스프레소 머신은 지난해 전 세계 매출이 170억 달러에 달했고 지난 8년간 연매출이 평균 30% 이상씩 늘었다.
FT는 네슬레 제품의 가격대와 종류가 다양한 것이 벌키 CEO가 불황 속에서도 성장을 점칠 수 있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네슬레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인 '공유 가치 창조(CSV·Creating Shared Values)' 경영도 불황에 의외의 성과를 냈다.
CSV의 일환인 '보급형 식품(PPP·Popularly Positioned Products)'제도는 지난 몇 년간 네슬레가 개발도상국 고객들을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큰 포장 용기에 담아 다량 판매하던 제품을 저소득층이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낱개로 포장해 판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불황으로 선진국 소비자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PPP를 찾는 고객이 늘어났다. 지난해 전 세계 PPP 매출은 2억1200만 스위스프랑으로 전년 대비 27% 급증했다. 불황 속에 효자상품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특히 유럽지역의 경우 2007년 2120만 스위스프랑에 불과했던 PPP 매출은 지난해 7820만 스위스프랑으로 36% 늘었다.
벌키 CEO는 "불황에 저렴한 식품을 찾는 수요자가 늘면서 낮은 가격대에 낱개 포장을 통해 시장에 유통되는 PPP가 큰 호응을 얻은 것"이라며 "네슬레의 가치경영이 적절한 '타이밍'을 맞아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중국의 멜라민 파동이나 최근 신종플루 등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는 네슬레는 물론 전 세계 식품업계에 위협이 되고 있다. 벌키CEO 역시 "현재 가장 큰 우려는 경기침체로 인한 매출 감소보다는 식료품 원자재의 세계화로 인해 소비자들이 갖게 된 식품에 대한 불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오랜 기간 동안 고객과 쌓아온 신뢰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없기 때문에 네슬레가 가장 우선시하는 가치는 고객과의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신기림 기자 kirimi99@aj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