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2시30분 서울 양재동 현대ㆍ기아차 본사 앞. 현대ㆍ기아차 노조 대의원과 금속노조 소속 완성차 노조원 수백여 명이 모였다. 전주공장 주간연속2교대제 실시를 요구하기 위해 상경한 것이다. 이들은 항의서한을 회사 측에 전달하고 4시 30분께 자진 해산했다.
노조원들이 상경 집회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날 분위기는 예전과 달랐다. 그 흔한 몸싸움도 없이 약간의 실랑이 끝에 항의 서한을 전달하고 시나브로 ‘투쟁’을 접었다. 공세적이던 예전과 달리 수비적 자세를 취한 것이다. 노조가 최근 한 발 뺀 터라 이번 항의 집회 성격은 일종의 제스처에 가까웠다. 역시나 요란했던 구호 속에 현장 근로자들의 진심은 담기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13일 결국 예상대로 노조는 파업 대신 견해차를 좁히기 위해 사측과 주간연속2교대제 논의에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이날 노조는 향후 투쟁일정조차 잡지 않았다.
노조가 투쟁의지를 접은 이유는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 업계가 위기인데 파업을 할 경우 귀족노조의 정치 파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조원들의 강한 반발도 한 몫 했다. 실제로 1월1일 비공개로 바뀐 현대차 노조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파업 결정을 비판하는 글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노조의 파업 결정을 ‘철부지’로 인식하고 있었다. 전 세계 자동차 업계가 위험에 처해 실직 위기를 겪는 상황인데도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게 노조원의 입장에서는 답답했던 것이다.
현대차 노조 탄생의 모태인 민투위 게시판은 파업 비판 일색이다. 자신을 불놀이라고 칭한 노조원은 상경투쟁 이후인 13일 민투위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티브이에서 보니까 서울 가서 집회하면서 우리가 주간연속2교대를 주장하는 비정규직 고용보장을 위한 거라고 하는데, 작년에 주간연속2교대 추진할 때는 심야노동철폐가 목적이라고 했는데 지금 와서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은 또 뭐냐”며 집행부의 이중적 태도를 지적했다.
그는 “물량 있을 때 추진하자는 회사의 이야기에 조합원들이 동조해서 파업 안한다고 할까 싶어서 겁나나? 니들 말도 이제 못 믿겠다. 집행부 니들을 위한 활동을 하지 말고 조합원들을 위한 활동을 해라”며 원색적인 어투로 비난했다.
자신을 조합원이라고 밝힌 이는 “전 세계 자동차 회사들이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데, 집행부만 파업하자고 날뛰고 있으니 답답하다. 여기저기 비난의 목소리가 날아오고, 조합원들의 원성도 날로 커 가는데 조합원을 대신해 활동해 달라고 뽑아놓은 집행부가 조합원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을 벌이고 있으니(답답하다). 집행부 집단을 위한 노동조합인가, 이제 정신 좀 차릴 때도 되지 않았나!”고 비판했다.
◆풍전등화 신세 자동차 업계..파업은 '몰락 자초'
이미 국내외 자동차 업계는 풍전등화의 신세다.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 쌍용차 하청업체의 부도가 현실화하고 있다. GM대우도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중소형에서 선전하는 덕에 세계 자동차 '10걸' 중 유일하게 감원을 하지 않고 있는 현대ㆍ기아차도 올해 1분기 최대 30%를 감산키로 했다. 사실상 국내 자동차 업계는 ‘몰락’ 직전이다.
해외 업체는 국내보다 더하다. 미국의 작년 차 판매대수는 2007년보다 18% 줄어 1992년 이후 16년 만에 최악을 기록했다. 미국 자동차회사의 판매는 20% 이상 감소했다. 도요타도 적자로 돌아서면서 3월 이내에 전 공장 가동을 11일간 중단한다. PSA(푸조-시트로앵)도 올해 전 세계에서 최대 1만2000명을 내보낸다. GM은 올해 1만 여명의 사무직 근로자를 정리해고하기로 했다. 당장 눈앞이 천 길 낭떠러지인 셈이다.
현대ㆍ기아차로서는 사실 해외업체의 불황이 기회다. 그동안 중저가에 고품질 차량 개발로 시장을 넓혀온 데다, 최근에는 고품질 대형차량까지 해외에서 호평을 얻고 있다. 이런 기세로 나간다면 해외시장에서 '빅3' 못지않은 시장 점유율을 기록할 수 있다는 조심스런 전망도 있다.
◆곱지 않은 시선..파업 진정성?'
노조의 파업을 보는 회사 안팎의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다. 구조조정도 아닌 근무제 변경 문제로 파업을 하겠다는 유아기적 행동에 노조원조차 신물이 난 상태다. 해외 공장과 연대해 해외공장에서까지 파업을 유발하려는 데에 이르러서는 노조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적잖다.
해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노사가 힘을 보태 위기를 기회로 바꿔 나가는 것이다. 다행히 지난달 미국 시장에서 유일하게 판매 실적이 올랐다. 이를 계기로 각 대륙별로 맞춤식 차량을 출시해 '오지랖'을 넓히는 것이다.
자신을 화천라인이라고 칭한 이는 민투위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지금 우리 회사 해외에서 잘나간다고 하는데 노동조합이 발목 잡는다는 소리 들어서야 되겠나. 이 위기는 잘 넘기고 보자”며 노조의 태도에 일침을 가했다.
이런 지적을 인식한 듯 윤해모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장 역시 지난 2일 쟁대위 속보를 통해 “쟁의 발생 결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투쟁 전술에 신중을 기할 것”이라며 한 발 물러선 입장을 취했다.
김훈기 기자 bo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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