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충분히 일할 수 있는데 회사가 망해 사라지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 실업 공포가 환란 이후 10년만에 다시 엄습하고 있다.
청년들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죽을 힘을 다해 학점을 챙기고 영어 공인인증점수와 각종 자격증을 따는 등 이른바 '다방면의 스펙'을 갖췄어도 원하는 직장에서 아예 사람 뽑을 생각을 안하면 도무지 방법이 없다.
문제는 이 같은 실업공포가 이제 막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경기가 올해보다 추락할 것으로 보이는 내년 상반기가 되면 일자리가 늘기는 커녕 절대적인 수치까지 줄게돼 환란 당시를 방불하는 실업대란이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청년실업 문제를 걱정하지만 정부로서도 급속히 위축되는 경기 앞에 딱히 내놓을 묘책이 없어 부심하고 있다. 소극적이나마 만들어 내놓은 각종 경기부양책은 발표할 당시만 잠시 관심을 끌 뿐 실행도 되기 전에 실업한파에 얼어붙은 형국이다.
◇ 갈수록 커지는 실업공포
실물경제가 타격을 받으면서 일자리가 질이나 양면에서 급격히 위축,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직장인들을 실업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작년까지 30만명 안팎을 기록하던 취업자 증가수는 올해 하반기부터 뚝 떨어져 지난 8월에는 절반수준인 15만9천명을 기록하더니 다시 9월에는 11만2천명, 10월에 9만7천명으로 떨어졌고 11월에는 7만8천명에 불과했다. 최근 3개월만에 또 반토막이 난 것으로 정부가 한차례 줄여서 발표한 목표치(20만명)의 3분의 1을 갓 넘는 수준이다.
일자리가 이처럼 늘지 않으면서 통계청 집계로 '사실상 백수'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도 11월 기준으로 275만4천명이나 된다. 공식적인 실업자(75만명)보다도 구직단념자(12만5천명), 취업준비자(55만2천명), 그냥 쉬는 사람(132만7천명) 등이 훨씬 많다.
특히 별다른 이유없이 '쉬었다'는 사람이 132만7천명으로 작년 동기와 비교할 때 8만명, 6.4%나 증가했고 구직포기자도 12만5천명으로 2만5천명이 늘었다.
실업은 아니지만 더 일을 해야할만큼 일자리가 시원찮은 불완전 취업자도 많다. 주당 근무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거나 급여가 너무 적어 그 일만 갖고는 안정된 생활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주당 36시간 미만 취업자는 11월 기준으로 275만8천명이지만 이 가운데 추가취업 희망자는 41만7천명이나 된다. 10월의 37만7천명에 비해서는 4만명, 또 작년 11월의 35만3천명에 비해서는 6만4천명이 각각 늘어났다.
이 같은 불완전취업자의 경우 일을 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 분간이 안가는 경우도 많아 '반(半)백수'로 불리기도 한다.
주당 평균취업 시간도 46.5시간으로 전년동월대비 1.5시간이 줄었다. 도소매 음식숙박업이 1.5시간, 제조업은 1.8시간, 건설업은 2.0시간이 각각 감소했다.
취업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일거리가 없기 때문으로 이런 현상이 심해지면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지고 결국 실업자 증가로 이어진다. 일자리는 경기의 바로미터로 경기불황이 심해지면 급속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 이제 시작일뿐..내년은 '고용 빙하기'
이런 고용 쇼크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내년 상반기에는 실물경제가 바닥을 향하면서 고용 빙하기가 닥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가뜩이나 '고용 없는 성장'이 진행돼온 상황에서 일자리 창출 동력인 내수와 수출이 동반 감소해 고용 한파가 불가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내 6개 기관이 내놓은 내년 실업률 전망 평균치는 3.5%다. 올해 실업률이 3.2%로 예상되는 점에 비춰 0.3%포인트 높여잡은 것이다. 고용한파가 본격화된 지난 9~11월 실업률이 3.0~3.1%였다는 점과 비교하면 0.5%포인트 가량 높은 것이다.
기관별로 보면 한국은행과 LG경제연구원이 3.4%, 삼성경제연구소와 현대경제연구원, 한국경제연구원이 3.5%, 한국개발연구원(KDI)이 3.6%로 각각 전망했다.
특히 내년 상반기 실업률은 한국은행이 3.6%, KDI가 3.7%로 내다봤다.
이런 전망치는 올해나 작년(3.2%)보다 높지만 2006년(3.5%) 수준으로 겉보기엔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고용 창출이 부진한 상황에서 아예 경제활동을 포기한 비경제활동 인구가 급증하면서 생긴 착시효과에 따른 것이다.
연구기관들도 최근 공식 실업자에 포함되지 않는 비경제활동 인구가 급증하면서 공식실업률과 체감실업률 사이의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비경제활동 인구 증가가 실업률을 끌어내려 상승 압력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향후 실업률이 노동시장 상황에 비해서 낮은 수준을 나타내는 것은 유휴 인력의 확대 때문"이라며 "2009년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체감실업률은 실제(공식)실업률을 크게 상회하며 상승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KDI도 "비경제활동인구의 증가세로 실업률은 3.6% 안팎까지 확대되는데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식실업률과 체감실업률 사이의 괴리는 취업자 증가폭에 그대로 나타난다.
월별 취업자 증가폭이 내리막을 걸으면서 11월에는 5년만에 최저치인 7만8천명까지 떨어졌지만 실업률은 1분기 3.4%에서 더이상 상승하지 않고 오히려 2분기 이후에는 3.1%로 낮아진 것이다.
한국은행이 내년 취업자 증가폭을 4만명, 특히 상반기에는 마이너스 4만명으로 전망한 것은 고용한파의 강도가 훨씬 세지고 장기화되면서 빙하기가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을 그대로 보여줬다.
◇ 정부 대책 미약..'언발에 오줌누기'
고용 빙하기가 닥쳤는데도 정부는 이렇다할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자리 창출 노력을 수차례 강조했지만 정부 정책은 주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훈련이나 인턴제 등에 치중하고 있다.
예컨대 청년 취업 및 중소기업의 인력난 완화를 위해 임금의 50%를 지원하는 청년인턴제를 확대한 것이나 글로벌 청년리더 10만명, 미래산업 청년리더 10만명 육성 정책을 꼽을 수 있다.
나아가 서비스산업 선진화, 중소.벤처기업 창업, 규제완화 등을 통해 고용 유발 효과를 기대하지만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당장 일자리가 늘어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가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지만 내수와 수출이 동시에 하향 곡선을 그리고 주요 산업현장이 가동시간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나오기 어렵다. 일자리 창출은 커녕 유지도 어려워 보인다.
정부가 내년에 16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확대할 방침이지만 즉시 효과를 낼지도 의문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일자리 관련 예산안 쟁점과제' 분석 자료를 통해 "정부의 일자리 창출 사업은 재원 배분의 우선순위가 설정돼 있지 않으며 창출된 일자리의 질적인 문제도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고용 사각지대에 있는 계층에 대한 재원배분이 적정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내년 사회서비스 일자리 지원사업 예산안 중에 취업 취약계층에 한정해 지원하는 사업의 비중은 14.6%에 그친 것이 그 사례다.
또 양적인 성과만 강조하다 보니 질적으로 '괜찮은 일자리'의 창출이 미흡하다고 예산정책처는 지적했다. 사회서비스 일자리 지원사업 중 10개 사업은 임금수준이 월 최저임금(90만4천원)보다 낮으며 고용안정성도 낮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고용에 앞장서야 할 공공부문에 감원 바람이 부는 것도 취업난을 가중하고 있다. 한국농촌공사가 15%, 한국전력이 10% 등 직원을 줄이는 공기업들의 경영 효율화 대책이 속속 마련되면서 공기업 채용시장은 사실상 문을 닫은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