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사면초가에 빠졌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신용위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미국의 구제금융안 시행이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의회와 여론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비롯해 주요 정책당국자들이 구제금융안의 조속한 시행을 촉구하고 있는 반면 민주당을 중심으로 의회가 제동을 걸고 나섰기 때문이다.
구제금융안의 실효성에 대해 신중론을 펼치고 있는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도 구제금융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고 있다.
◆버냉키 "미국 경제 가동 중단될 수 있다" vs. 의회 "규모 줄여라"=버냉키 연준 의장은 24일(현지시간) 상·하원 합동경제위원회에 출석해 "미국의 경제성장은 혼란을 겪고 있는 금융시장의 안정 여부에 달려있다"면서 "구제금융이 시행되지 않을 경우 미국 경제의 가동이 사실상 중단되는 사태를 맞이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사진: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왼쪽)과 벤 버냉키 연준 의장(오른쪽)이 24일(현지시간) 하워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구제금융의 조속한 시행을 강조하고 있다. |
구제금융 시행에 대한 신중론이 확산되고 있는 미 의회에 사실상 최후통첩을 한 것이다.
그는 "구제금융이 시행되지 않으면 기업이나 소비자 모두 자금을 융통할 수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버냉키 의장의 발언은 전일 금융위원회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일각에서 일고 있는 부실 금융기관의 모럴헤저드를 비롯해 정책 당국의 원칙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구제금융의 시행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 의회는 여전히 구제금융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은 정부가 승인을 요청한 7000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법안에서 공적자금을 1500억~2000억달러 수준으로 삭감하는 방안을 정부측에 수정 제시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보도했다.
민주당 의회 지도자들은 공적자금 규모를 대폭 삭감하고 이후 재원이 추가적으로 필요할 경우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이 공적자금을 축소하는 방안을 헨리 폴슨 재무장관에게 개인적으로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의 찰스 슈머 상원의원 역시 전일 상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한 폴슨 장관에게 구제금융에 착수하는데는 1500억달러가 충분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슈머 의원과 펠로시 의장 등 의회 지도 세력이 정부의 구제금융안을 거부한 가운데 민주당 전체 의원 역시 공적자금을 대폭 삭감하는 방안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폴슨, 타협안 마련...CEO 연봉 상한선 포함=상황이 정부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폴슨 재무장관이 타협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폴슨 장관은 민주당이 구제 대상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 연봉에 상한선을 두는 것을 구제금융 법안에 포함시키라는 요구를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폴슨 장관은 이날 하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신용위기 사태에도 CEO들이 거액의 보상을 받고 있는 것에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서 "구제금융 법안에 이를 반영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폴슨 장관은 이같은 법안 수정을 위해서는 구제금융 법안 전체의 효과를 훼손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폴슨 장관의 발언은 전일 "CEO들의 연봉을 제한할 경우 구제금융 이행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크게 양보한 것으로 의회에서 이를 받아들일 지 주목된다.
◆美 국민 55% "공적자금 투입 반대"...부동산 시장 침체 지속=여론 역시 부시 행정부의 구제금융안 시행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미 국민의 절반 이상이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한 공적자금 투입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 블룸버그통신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5%가 파산 위기에 처한 민간 금융기관을 공적자금 투입으로 구제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대답했다.
찬성한다고 밝힌 응답자는 31%로 전체의 3분의1에 미치지 못했다.
응답자의 32%는 현재 금융위기에 대해 월가 금융기관이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답했으며 부시 행정부에게 책임이 있다는 응답자도 26%에 달했다. 11%는 의회에게 신용위기의 책임을 물었다.
당국의 규제가 부실했다는 점에도 국민들의 질타는 이어졌다. 통신은 국민의 62%가 정부당국의 규제 부족이 신용위기를 불러왔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자동차업계에 대한 지원안이 의회에서 검토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반대 비율도 64%에 달했다.
사진: 신용위기 사태가 악화되면서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사진을 플로리다에서 연설하고 있는 오바마. |
경제가 악화일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대선에서는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가 유리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48%가 오바마가 차기 대통령으로서 금융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고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를 택한 비율은 35%였다.
이번 조사는 미 전역의 성인 1428명을 상대로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전화로 실시됐다.
한편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시장발 신용위기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동산시장은 여전히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전미 부동산중개인협회(NAR)가 공개한 8월 기존주택판매 연율 491만채를 기록해 전월 502만채에 비해 2.2% 감소했다.
이는 월가가 예상한 494만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중간 주택가격 역시 20만3100만달러를 기록해 전년 대비 9.5% 하락했다.
민태성 기자 tsmi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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