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유동성 부족으로 파산 위기에 몰린 AIG에 85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키로 결정하자 국내외 투자자들은 일단 급한 불을 끄게 됐다며 안도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위기가 지나갔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실물경제로 전이돼 세계 경제가 한동안 침체기를 겪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다만 언제쯤 미국발 금융위기가 해소되고 세계 경제가 안정을 되찾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였다.
◆ 서브프라임 위기 여전히 진행형 = 정부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과 FRB의 AIG 지원 결정 등 일련의 사건을 통해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속단하기 이르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최근 터져나온 미국발 금융위기는 1년 이상 끌어온 문제들이 하나씩 전개되고 있는 것"이라며 "어려운 시기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신용경색 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있다고 볼 수는 있다"며 "그러나 어디서 무슨 사건이 터질지 몰라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해소되고 있는 것일 뿐 실제 발생한 손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장 연구위원은 "상당한 기간 동안 충격이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대기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사태는 예전부터 문제가 있을 것으로 예상해왔던 금융기관의 부실이 드러난 것"이라며 "일각에서는 문제가 모두 노출됐다고 생각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만큼 위기가 끝났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위원은 "파생상품에서 발생한 손실이 메워졌다고 서브프라임 사태가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며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 부동산 경기가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재식 대신증권 시장전략팀 선임연구원도 "FRB가 AIG에 유동성을 지원했다고 해서 미국발 금융위기가 정점을 쳤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오히려 시급한 유동성 위기를 막기 위한 대증요법에 가깝다"고 말했다.
◆ 실물경제 수축국면 돌입할 것 = 이번 신용경색 위기가 자산가치 하락과 달러화 강세 등의 문제를 불러와 실물경제가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장 연구위원은 "미국 경기의 둔화세가 더욱 심화될 수 있다"며 "미국 경제와 동조화 현상을 보이는 세계 경제도 당연히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1990년대 이후 세계 경제가 안정적인 성장을 유지해 온 것은 금융시장 활성화에 기인한 바가 큰 만큼 금융위기는 경제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며 "신흥 경제국의 성장세가 세계 경제의 경착륙을 막아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외자 차입이 힘들어지면 신흥 경제국도 위기를 겪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성태 한은 총재도 "실물경제의 위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며 세계 경제는 물론 국내 경제도 적어도 올해 내에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회복 시기에 대해서는 전문가마다 의견이 달랐다.
장 연구위원은 "내년 들어 세계 경제가 강한 회복세를 보일 것인지에 대해 낙관하기 힘들다"며 "내년 하반기까지는 조정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이 연구위원은 "경기 전망과 유가 동향 등을 감안했을 때 실물경제 위기는 내년 상반기에 저점을 찍을 것"이라며 "물가 상승 압력도 점차 해소되고 있어 세계 각국 정부들이 금리 인하 등을 통해 경기부양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최 선임연구원은 "부실 금융기관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원은 계속될 것"이라며 연말이나 내년 초를 저점으로 반등에 나설 것으로 내다봤다.
◆ 월가 위상 이어질 듯…감독은 강화해야 = 이번 사태로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가 세계 금융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것이라는 의견에 대해 전문가들은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장 연구위원은 "지나치게 안이하고 오만했던 영미식 금융시스템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뉴욕의 헤게모니가 무너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런던은 뉴욕의 금융시스템과 흡사해 대안이 되기 어렵고 중동이나 아시아 금융시장은 아직 협소하다"고 평가했다.
지나치게 복잡한 금융공학을 활용한 파생상품 위주의 금융시스템이 문제를 불러오기는 했지만 뾰족한 대안도 없다는 것이다.
이 연구위원도 "중동이나 아시아의 국부 펀드는 자금일 뿐"이라며 "뉴욕은 글로벌 자금이 모이는 곳으로 자금이 시스템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동안 지나치게 완화됐던 금융 규제를 다시 강화하고 감독 기능도 살려 제2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예방할 필요는 있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위원은 "규제나 감독이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며 "한 곳에 집중된 위험을 파생상품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분산하기만 하면 위험이 헤지된다고 착각했던 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재호 문진영 기자 gggtttppp@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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