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와 주주가치
2024-12-02 07:00
"지금 사대부들이 명나라 원수를 갚겠다면서 그까짓 상투 하나 못 자른단 말이오. ··· 뭐든 바꿔서 잘살 수 있다면 바꿔야지. 옛것만 고집하고 있으면 언제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소?"
연암 박지원이 쓴 소설 '허생전'을 보면 당시 사회 지배층인 양반의 무능함을 통렬히 비판하는 부분이 나온다. 허생이 조정에서 신임하는 어영대장 이완에게 나라를 변화시킬 세 가지 계책을 알려주지만 이완이 모두 예법에 어긋난다며 거절하자 허생이 이와 같은 말로 준엄히 꾸짖는 장면이다.
실학자 박지원이 보기에 조선의 지배층은 명분만 앞세운 무능한 위선자들이었다. 청나라를 치자는 북벌론을 주장하면서도 준비나 실행에는 전혀 나서지 않았고, 백성들이 굶주릴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실질적인 대책 마련에는 손 놓고 있는 책상물림 선비들이었다.
미국 대선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국내 주식시장을 보면서 연암이 쓴 소설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국내외 투자자들이 국내 주식시장을 떠나고 있는데 정부나 정치권은 뾰족한 대책을 내놓기는커녕 대립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1일 2896으로 연 고점을 찍었던 코스피 지수는 약 4개월 만에 장중 2400선을 내주는 등 그야말로 날개 없는 추락을 이어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주의 무역 등으로 한국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 지수에 비해 한국 증시가 유독 약세를 보이는 것은 이상할 정도다. 실제로 최근 한 달간 코스피 지수는 7% 이상 하락했지만 일본 닛케이와 대만 자취엔지수는 1% 안팎 하락에 그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한 가상자산 거래소의 일주일간 거래대금이 코스피 거래대금을 넘어섰다는 웃지 못할 뉴스도 전해졌다. 대표적인 밈코인인 도지코인의 5대 거래소 거래대금이 코스닥 거래대금을 웃돌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한국 기업들의 대표적인 자금 조달 창구인 주식시장이 가상자산 거래소와 일개 밈코인에도 밀렸다는 이야기다. 외국인은 물론 국내 투자자들조차 국내 주식시장(국장)을 외면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많은 증시 전문가들은 투자해 봐야 돈을 벌지 못한다는 반복된 학습 경험이 투자자들이 국장을 떠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결국 해답은 국장에 투자해도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 그리고 국내 주식시장이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데 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정치권에서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상법 개정안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 법의 핵심은 이사(경영진)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것으로, 이는 아주 상식적인 일이다. 그런데도 주식시장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겠다는 상장회사들이 부작용을 우려한다며 경영진의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정부의 입장 선회도 우려스럽다. 올해 초만 해도 윤석열 대통령은 "소액 주주의 이익 제고를 위한 상법 개정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최근 금융당국은 "회사 경영과 자본시장에 미칠 부작용이 크다"며 상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어떤 법이든 부작용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파국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 부작용은 감수해야 한다. 투자자들이 국장을 다 떠난 뒤에 부작용을 운운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조선 후기 사대부들에게 상투는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중요한 가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이 망한 뒤 상투는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박지원이 허생의 입을 빌려 통렬히 비판한 이야기가 200년 뒤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