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옥돌을 갈고 있는 환상 속을 헤맸다"···김기만이 전한 이을호 흔적의 울림

2022-01-27 18:17
향년 67세…고문 후유증에 시달린 비운의 천재

"무차별 구타를 당한 후 스스로가 올빼미로 생각되고, 밤새 옥돌을 갈고 있는 환상 속을 헤맸다."

이을호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26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7세.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유신·독재시대를 버텨낸 고인의 한 서린 삶은 기어이 전장을 뒤덮고야 마는 고요와 함께 스러졌다. 결코 평탄치 않은 삶이었다. 천재라는 수식어가 누구보다 잘 어울렸지만, 모진 고문으로 인해 그 반짝임을 잃어야만 했다.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이을호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빈소 [사진=민청련동지회]


고교 동문인 김기만 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천재 이을호'가 세상을 떴다. 그를 보석 같이 아끼던 민주화운동 선·후배들의 눈가를 적시게 한 채 우리 곁을 떠났다"며 고인을 기렸다.

대학생 시절 서울대 뒤 낙산 부근에서 함께 하숙했던 기억도 쏟아냈다. 김 전 사장은 "철학도였던 우리는 김수중(전 경희대 교수) 형 등과 숱한 밤을 새우며 철학 토론을 하기도 했다"며 "30여년 전부터는 전북 민주화동우회 활동을 같이 한 일생의 동지였다"고 말했다.

고인은 살아 생전 지인들에게서 아낌을 받았다. 1955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그는 전주고를 수석 졸업하고, 1974년 서울대 사회계열로 입학했다가 철학과로 전과했다. 이후 ROTC(학생군사교육단)로 졸업과 임관을 앞둔 1977년 소설가 김영현·시인 김사인 등과 유신 반대시위를 주도하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고인을 아꼈던 철학과 교수들이 '이을호는 정신질환자'라는 진단서를 떼 석방시킨 일화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졸업 이후 1983년부터다. 고인은 그해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주도한 민주화운동단체 민청련 창립에 참여했다. 이듬해 내부 세미나 주제발표에서는 운동권 운동론을 CDR(시민민주혁명론)·NDR(민족민주혁명론)·PDR(민중민주혁명론) 등 세 가지로 정리해 ‘C·N·P 논쟁’에 불을 붙였다.

민청련은 그아말로 삶의 터전이었다. 현재 서울시의회 의원(더불어민주당)인 
아내 최정순씨(66)도 이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최씨는 고인이 고문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올해까지 살 수 있게 지탱해 준 강하면서도 어진 아내로 여겨진다.

삽십대 초반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인의 심신을 고달프게 한 고문의 흔적은 1985년 아로새겨졌다. 그는 민청련 활동으로 검거돼 남영동 대공분실을 거쳐 남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 후유증으로 양극성 장애 증세가 나타나 정신병원에 유치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다행히 1986년 6월 구속집행 정지 결정으로 풀려났지만, 2011년까지 매년 몇달씩 정신이상 증세로 입원해야 했다.
본인과 가족이 장기간 고통을 겪었다. 정상적으로 대화하다가 갑자기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지인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훗날 고인은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 고문 당시를 회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이을호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빈소 [사진=민청련동지회]


고인은 지난달 18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서울 경희의료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 기저질환에 따른 후유증으로 눈을 감았다. 민주화의 근간이자 교두보로서 지난한 삶이었다. '이을호'라는 이름 석자는 민청련 활동 당시 쓴 운동 이론과 성명서, 번역 출간한 '세계철학사'(전 12권·중원문화)에 남게 됐다. 정신이상 증세로 저서를 더 남기지는 못했다.

유족은 물론이고 빈소를 찾은 지인들은 고인이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였으며, 항상 나라를 걱정했다고 추억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2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28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