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은행 탈한국 행렬…공허한 글로벌 금융허브의 꿈

2021-04-20 05:00
한국서 소매금융 철수한 씨티, 홍콩·싱가포르선 사업 지속
배당삭감 주문·키코사태 등 관치에…금융정책 표심따라 흔들

한국씨티은행이 소매금융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힌 배경에는 글로벌 본사인 씨티그룹의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선택과 집중'을 위해 기업금융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 금융 경쟁력의 민낯이 명백히 드러났다고 보기도 한다. 씨티그룹이 대표적인 금융중심지로 꼽히는 홍콩과 싱가포르 등에서는 소매금융 사업을 이어가겠다고 결정했다는 점은 우리의 사례와 크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글로벌 금융 허브'라는 비전이 혼자만의 꿈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국씨티은행 본점 창구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배당 삭감 주문에…대법원 판결 뒤집는 금융당국

씨티은행의 소매금융 철수에는 '관치금융'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얘기도 은행권에서는 공공연하게 나온다. 정부가 나서서 현안별로 금융사의 경영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선진국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올해 초 있었던 배당 삭감 주문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월 시중은행에 오는 6월 말까지 순이익의 20% 이내에서 배당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5대 시중은행뿐 아니라 이례적으로 씨티은행과 SC제일은행 등 외국계 은행까지 대상으로 포함됐다.

어디까지나 권고라는 게 금융위 측 입장이지만, 은행권에서는 사실상 강제 사항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씨티은행은 당국의 권고에 따라 20.0%로 배당성향을 확정했다. 이는 예년에 비하면 대폭 축소된 수치다. 씨티은행의 배당성향은 2017년과 2018년 각각 35.0%에 달했다.

키코(KIKO) 사태 또한 관치금융의 한 예로 꼽힌다. 2013년 대법원 판결이 끝난 키코 사태에 대해 금융감독원이 재조사를 실시한 뒤 "피해 기업 4곳에 손실액의 15~41% 추가로 배상하라"고 결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씨티은행은 지난해 12월 이사회를 열고 피해기업 일부를 대상으로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의결했다. 당시 씨티은행은 "당행의 법적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에 대한 경제적 지원 차원에서 일부 기업에 대해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며 도의적 차원임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표심 따라 흔들리는 '금융 포퓰리즘'…외국계는 '탈한국'

'금융 포퓰리즘' 또한 한국 금융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한국을 국제 금융중심지로 육성해 해외 금융사를 유치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에 무색하게, 지역 표심에 따라 수시로 전략이 흔들리고 있다.

정부는 2009년 서울 여의도와 부산 문현을 금융중심지로 지정하고 10년 넘게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오히려 그 기간 동안 골드만삭스, 바클레이스은행, UBS은행, 맥쿼리은행, HSBC 등 글로벌 금융사들은 앞다퉈 '탈한국'에 나섰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치권은 제3금융중심지를 추가 지정하겠다고 공약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전북 제3금융중심지'는 여전히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금융위가 지난해 심의한 '제5차 금융중심지 조성과 발전에 관한 기본계획안'에 언급조차 되지 않으면서 사실상 무산됐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금융중심지 지정을 둘러싼 혼란을 본 금융권 관계자들은 "집약산업이라는 금융업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탁상공론"이라고 꼬집는다. 금융당국과 금융사 본사, 주요 기업들이 수시로 소통해야 하는데,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과 지방자치단체가 지방 이전만을 밀어붙여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혁신사업 발목 잡는 노조…여전히 호봉제 유지

한국의 경직된 노동시장에 대한 문제 제기도 끊이지 않는다. 씨티은행 노조는 금융노조 내부에서도 '강경파'로 분류된다. 여전히 호봉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도 글로벌 본사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요소다.

비단 외국계 은행만의 문제가 아니다. KB국민은행의 경우 최근 노조가 혁신 사업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국민은행은 2019년 국내 1호 혁신금융서비스로 알뜰폰 서비스인 '리브엠'을 출시한 바 있다.

노사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재지정 여부 결정을 앞두고 노조 측이 반대에 나섰기 때문이다. 노조는 "사측이 부당하게 리브엠 영업을 압박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금융위가 리브엠의 혁신금융서비스 지정 기간을 2023년 4월까지 2년 연장하면서 갈등은 일단락됐지만, 다른 은행에서도 신사업을 두고 비슷한 사례가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금융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폭넓은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강정규 한국법조인협회 변호사는 "국내에선 행정력을 통해 금융을 통제하는 관습이 아직까지 남아있고, 다른 정책적 목적을 위해 정부에서 통제하고 있다"며 "한국을 금융 허브로 키우려면 세제는 물론 규제 방식도 변경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