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2021-02-18 13:55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조선개국 후 60여년 만에 일어난 정변으로 인하여 단종과 세조의 왕위교체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조정의 신료들은 새로운 왕의 등장에 대한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라졌다. 그리고 반대파는 적극적 반대파인 사육신(死六臣)과 소극적 반대파인 생육신(生六臣)으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혼란의 현실 앞에서 절망한 어계 조려(漁溪 趙旅1420~1489)선생은 한양을 등 뒤로 한 채 홀연히 낙향하여 은둔함으로써 생육신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선생께서 강원도 영월 청령포의 단종 빈소로 문상을 갔다. 먼거리를 다닐 때는 가끔 승복으로 위장을 했다고 한다. 이 때도 아마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변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도착 후 동강을 건널 방법이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데 느닷없이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물을 건널 수 있었다. 이런 전설까지 안고 있는 어계 선생의 고택을 찾았다. 생각보다 더 소박했다. 문간 행랑채와 본채 그리고 사당이 전부였다. 마당의 은행나무만 장대하다.

고택에서 멀지않는 곳에 자리잡은 서산서원(西山書院)은 생육신을 모시기 위해 1703년 건립했다. 10년 후 나라의 공식적 인가를 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하지만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4년 동리 유지들과 조려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복원하였다. 6인의 중심은 어계선생이었다. 조려의 후손들이 대다수인 지역사회 최대문중인 함안조씨 영향력 때문이다.

서산서원의 서산(西山)이란 명칭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에 머물면서 오직 고사리로써 생명을 부지하며 읊었다는 ‘채미가(菜薇歌)’의 첫구절인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네(登彼西山兮 菜其薇矣)”라고 한 것에서 기원한다. 공자와 맹자도 그의 절개를 높이 평가했고 사마천은 그들의 행적을 「사기열전」권1에 수록했다. 뒷날 중국의 ‘청성’(淸聖:역대 은둔자 가운데 최고의 성인)으로 불렸다. 어계선생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형 인물인지라 후손들은 그 뜻을 받들고자 근처 산이름까지 백이봉 숙제봉으로 바꾸어 불렀다.

다시 내비게이션에 ‘무진정’을 입력했다. 군북면에서 가야면(함안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바깥경치도 수시로 달라진다. 얼마 후 이정표가 나타났다. 호수공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안내문 말미에는 ‘사진작가들에게 사계절 촬영지로 이름이 높고 신혼부부들의 웨딩포토의 무대로 인기가 많다’고 써놓았다. 이 정원의 전체적인 설계자인 조삼(趙蔘1473~1544 )은 어계 선생의 손자다. 은둔형인 할아버지는 검소와 절제를 미덕으로 삼고서 있는 그대로 자연의 품에 당신의 몸을 맡겼다. 하지만 손자는 달랐다. 다섯고을의 군수를 역임한 뒤 정쟁을 피하기 위해 자발적인 은퇴를 선택한 후 은둔자체를 즐겼다.

조삼 산생은 터를 보는 눈이 뛰어났다. 늘 주변경관까지 함께 살피는 안목을 지닌 인물이다. 작은 정자였지만 주변 경관이 더해지면서 훤출한 건물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목인데도 번다하지 않은 자리였다. 정자를 높은 언덕 우뚝한 곳에 보란 듯이 세웠다. 예사롭지 않는 주변 풍광에 더하여 벽오동과 노송이 가득한 언덕에 길을 내고 꽃나무를 심고 집터를 가꾸었다. 연못은 3개의 섬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섬 안에 심은 나무도 세월이 흐르면서 아름드리로 자랐고 뒷날 다리를 놓아 서로 연결되면서 관광의 격을 더욱 높였다. 정자를 포함한 이 호수 일대가 모두 무진정(無盡亭)이 되었다. 1542년 주세붕(1495~1554)이 지은 ‘무진정기(無盡亭記)’에는 “정자의 경치도 무진하고 선생의 즐거움 또한 무진하다”고 찬탄했다. 어쨋거나 그 이름에 걸맞게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달리하며 무진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연출했다. 무진은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걱정거리인 번뇌는 많아서 좋을 게 없다. 그래서 항상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라는 자기다짐을 해야 한다. 수시로 일어나는 번뇌를 그 때 그 때마다 잘 다스리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조삼은 조경과 건축의 대가인 동시에 ‘독서삼매’의 책벌레였다. 새벽부터 책 읽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심부름하는 이가 아침을 차려왔다. 밥상이 들어온 줄도 모르는 채 글만 읽었다. 한참 후에 할 수 없이 밥상을 내갔다. 점심상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질 무렵 허기가 밀려오자 그제서야 아침밥상(?)을 차리라고 부엌에 재촉했다. 저녁밥상을 들고 온 이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선생은 크게 웃었다. 식사 후 다시 밤이 깊어질 때까지 책을 읽었다. 무진정 주련에는 그 일을 짐작케 하는 시가 걸려 있다.

여섯 종류 경전을 공부하다가 먹는 것도 잊으니(六經咀嚼忘食)
위아래 구름 그림자가 하늘빛이 되었네(上下雲影天光)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보내고 맞이하면서도(送迎淸風明月)
또한 마땅히 백성과 나라를 먼저 걱정하네(亦當民國先憂)

공간이란 자기의 또다른 표현수단이다. 그래서 어계의 공간과 조삼의 공간은 다를 수 밖에 없다.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세대차이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개인의 가치관과 성정도 건축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어계고택은 소박미와 절제미의 압축판이며 무진정과 그 일대의 정원은 적극적인 자기표현의 결정판이라 하겠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라고 했던가. 어계고택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무진정 조경은 화려했지만 정자까지 사치스럽지는 않았다.
 

[무진정]

[어계선생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