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4)] 한글 속에 하느님 있다, 류영모는 '우리 말글의 성자'
2020-09-07 10:34
글자 하나에 철학 개론이 들어있다
말은 보이게 하면 글이고, 글을 들리게 하면 말이다. 말과 글은 신의 뜻을 담는 신기(神器)요 제기(祭器)다. 신의 뜻을 나타내자는 것이 말이요, 신에 대한 사모를 드러내자는 것이 글이다. 이렇게 광야에서 외쳤던 사람이 이 땅에 있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았던 철학사상가 다석 류영모(1890~1981)다.
"우리 말도 이런 정도가 되어야 좋은 문학 좋은 철학이 나오지, 지금같이 외국서 얻어온 것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글자 한 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있고 말 한마디에 영원한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 말에는 우리말과 우리글로 철학하는 일에 대해 지녔던, 류영모의 깊은 자부심과 소명의식과 주체의식이 들어있다. 21세기에 들어서야 우리는, 한국의 고유한 사상과 철학의 부재뿐 아니라, 사상과 철학을 개념화하고 일상화할 '우리 언어'에 대한 모색과 성찰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지금에야 몹시 부끄러워하고 통탄하는 지경이다. 그런데, 저런 말을 하는 선구자 다석이 있었다.
'얼나'라는 개념을 제시하다
그는 한글과 우리말의 참사상가였다. 한국의 현대적인 신학사상의 가장 큰 봉우리로 꼽히는 그는, 한글과 우리말로 사유체계와 개념세계를 펼쳤다. 다석은 서구 정신가치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의 교리와 교의(敎義) 체계들이 강조해온 형식적 측면이, 성서가 담지하고 있는 종교의 본연(本然)을 오히려 간과하거나 위축시켜온 점이 있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서구인들이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배제한 '한 외부인(동양인)'의 시선으로, 류영모는 기독교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순수한 결합을 갈망하는 인간의 보편적 희원(希願)을 담은 가치있고 힘있는 신앙사상임을 포착한다.
그는 하느님과 인간을 통하게 하는 '얼나(성령으로서의 자아, 영아(靈我))'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이 품는 생각이 피워올리는 불꽃이, 절대적 개념인 신성(神性)과 닿는 접속점을 상정한 것이다. '얼나사상'은, 신의 숨결인 '얼'이 인간 주체인 '나'와 만남으로써 신앙이 구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논리를 갖추고 있다. 이처럼 다석은 한글과 우리말로 그의 철학을 오롯이 전개했으며, 빈탕한데, 없이계심, 말숨, 한얼, 긋, 깨달음, 씨알과 빛고을정신, 가온찍기, 신의 막대기(한글 모음 'ㅣ'), 신비와 신통 등 우리말과 한글을 십분 활용한 개념들을 풍성하게 제시했다.
다석의 사유(思惟)는 깊고 오랜 역사를 지닌 서구의 기독교를 뛰어넘을 만큼, 보편적이면서도 참으로 새로운 기독교의 장(章)을 펼쳐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기업화한 종교와 권력화한 교회'의 약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지금, 이런 생각들은 의미심장한 신앙적 실천으로 주목받는다. 다석이 제시하고 실천한 신앙의 방식은 '집단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서의 믿음도 아니었고, 목자(牧者)들이 발행하는 기복적(祈福的)인 '천국보험'도 아니었다. 국가라는 공동체 권력에 종교적 이상(理想)을 꿰어맞추던 인류의 오래된 오류도 거부했다. 다석은 신앙하는 인간 개개인의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신에 다가가야함을 역설했다.
코로나19, 인류의 극성(極盛)한 밀착문명을 강타
류영모 사상이 최근 각별한 주목을 받게 되는 까닭은, 2000년 이상 인간을 번성하게 해온 '밀착적 인간문명'의 '좁은 사이'를 코로나 바이러스가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의 종교 또한 신과 인간의 단독자 대면이 아닌, 밀착한 인간 군집(群集)이 신에게로 나아가려는 제의(祭儀)처럼 여겨져 왔다. 이런 종교적 형식이 코로나를 번성시키는 난감한 역설을 불렀다. 류영모는 교회의 이런 형식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 바탕이 바로 '얼나' 개념이다.
얼나는 인간 개개인의 생각 속에 들어있지만, 신과 개인을 잇는 매체이다. 다석에게 이런 사유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말의 힘일지도 모른다. '얼'은 한자의 '영(靈)'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얼은 '알(卵)'이며 '속(내면)'이며 '씨앗'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줏대'이며 '영혼'이며 '신의 정수'이다. 이 '얼'이라는 한 글자가 있었기에, 다석은 종교적 사유를 폭넓고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한글은 영어 알파벳을 능가하는 글입니다
한글이나 우리말이 과연 서구 신앙인 기독교의 정수를 표현하고 개념을 확장할 그런 말이 될 수 있을까. 지나치게 우리 입장에서만 생각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외국인이, 한글과 우리말의 놀라운 점을 일찍이 외국언론에 긴급 타전한 일이 있었다. 류영모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889년에 있었던 일이다. 고종황제의 외교자문역이었던 호머 헐버트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1863년 미국 버몬트주 태생인 헐버트는 1886년 대한제국 왕립 영어학교 육영공원 교사로 내한했다. 3년 뒤 그는 뉴욕트리뷴(New York Tribune)에 조선 말글의 우수성에 대한 내용을 담은 ‘조선어(The Korean Language)’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다.
(헐버트는 1892년 1월 '조선글자'라는 논문을 발표해, 한글 기원과 문자적 우수성,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고찰한 바 있다. 또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해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코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6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일제로부터 강제추방 조치를 당했다. )
헐버트의 이 기고문은 사단법인 헐버트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가 2018년 재외동포신문에 기고한 바 있다. 헐버트는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이런 말을 남겼다.
"글자 구조상 한글에 필적할 만한 단순성을 가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모음은 하나만 빼고 모두 짧은 가로선과 세로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고 식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과제가, 이곳 조선에서는 수백년 동안 현실로 존재했다. 표음문자 체계의 모든 장점이 여기 한글에 녹아 있다. 영어는 모음 5개를 각각 여러 개의 다른 방법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이러한 체계가 절대 불가능하다. 조선어는 영어가 라틴어보다 앞서 있는 만큼 영어보다 앞서 있다. 조선어에 불규칙 동사 따위는 없다. 어미를 한번 배우고 나면 누구든지 곧바로 모든 동사의 어형 변화표를 어간만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다."
다석 "가장 중요한 우리말은 빔과 가온찍기"
이제 다석이 남긴 우리말 관련 발언을 몇 개 살펴보자. 그는 우리말로 여러 가지 심오한 생각을 펼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나는 '모름지기'란 우리말을 좋아한다. '모름지기'란 반드시 또는 꼭이란 뜻이다. 사람은 모름(하느님)을 꼭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른다. 하느님 아버지를 다 알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1957)
"'더욱'이란 더 우로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욱은 우로 올라간다는 것을 강조해서 'ㄱ'을 받침으로 붙였다. 그러므로 더욱은 더 우로이다. 삶은 정신적으로 더욱더욱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야 한다."(1957)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절대)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데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를 깨닫는 것이다. 깨달으면 하나이다. 하느님의 나가 '한나' '하나'이다." (1956)
"물에 용이 뛰듯이 참말 속에는 참뜻이 튀어 오른다. 영원히 사는 것은 참(하느님)뜻뿐이다. 하느님의 뜻은 시작도 마침도 없이 영원하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인 참뜻만은 지니고 가야 한다. 하느님의 뜻인 참뜻이 나의 본체인 참나(얼나)이다." (1957)
"영원한 님(하느님)을 그리는 글이 바른 글이다. 영원한 님을 그리지 않는 글은 몽땅 그른 글이다."(1957)
말숨(말씀)은 숨의 마지막이요 죽음 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말숨 쉼은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말숨을 생각하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요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도 하다. 말숨을 쉬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요 하느님으로 사는 것이다. 말숨은 우리 맘속에서 타는 참(얼)의 불이다.(1957)
"우리말에서 내가 가장 긴요하게 생각하는 낱말은 허공인 '빔'과 절대인 '제계(저기의 계(界), 불교의 피안(彼岸)을 의미)'와 돈오(頓悟)인 가온찍기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1960)
헐버트 "한글은, 일본·중국·서구·산스크리트 문자보다 낫다"
다음은 헐버트기념사업회가 본지에 보내온 헐버트 박사의 1889년 뉴욕트리뷴 지 기고문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추린 것이다. ( 조선어(The Korean Language) 뉴욕트리뷴(New York Tribune) 1889년)
"조선에는 모든 소리를 자신들이 창제한 고유의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완벽한 문자가 존재한다. 음소문자인 조선 문자는 음절문자인 일본 문자와 매우 다르며, 각 음절은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조선 문자는 영어가 중국 문자인 한자와 다른 만큼 한자와도 크게 다르다. 중국 한자는 조선 문자와 달리 글자와 발음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 조선은 아시아의 두 대국 일본과 중국 사이에 자리 잡고 있지만, 조선 문자는 일본 문자나 중국 문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오히려 철자법 구조상 영어의 알파벳과 비슷하다. 조선 문자인 한글을 산스크리트 문자와 비교하기도 하지만, 세밀히 연구해보면 한글은 완벽한 문자가 갖춰야 하는 조건 이상을 갖추고 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고 식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과제가 이곳 조선에서는 수백년 동안 현실로 존재했다. 즉, 글자 하나당 발음이 딱 하나씩이다. 음절 앞부분의 자음이 생략될 때 동그라미로 표시하긴 하지만, 묵음이라는 게 전혀 없다.
표음문자 체계의 모든 장점이 여기 한글에 녹아 있다. 영어는 모음 5개를 각각 여러 개의 다른 방법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이러한 체계가 절대 불가능하다.
영어는 자음이 필요 이상으로 많지만 모음은 턱없이 부족하여 모음 하나가 둘, 셋, 아니 넷의 역할을 한다. 조선어는 모음이 자음만큼 많아서 아이들이 처음 외울 때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결국에는 엄청난 양의 보이지 않는 수고를 덜어 준다.
감히 말하건대 아이가 한글을 다 떼고 언어생활을 제대로 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영어 ‘e’ 하나의 발음 및 용법의 규칙과 예외를 배우는 시간보다 더 적게 들 것이다."
다석 한시 '천음인언(天音人言, 하느님 말씀과 인간의 말, 1956.11.16)'
生來有言借口能(생래유언차구능)
死去無口還本音(사거무구환본음)
代代斷言猶遺志(대대단언유유지)
世世欲言大蓄音(세세욕언대축음)
태어나 말할 수 있으니 빌린 입으로 할 수 있고
죽어선 입이 없으니 하느님 말씀으로 돌아가네
죽어 대대로 말이 끊기지만 하느님 뜻이 남고
살아 대대로 말하려 하니 하느님 말이 크게 쌓이도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직 하느님의 뜻밖에 없다. 영원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입을 꽉 다물어도 뜻만 있으면 영원히 갈 말씀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소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
상대세계의 인간과 절대세계의 신이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그 시간 속에 쌓이는 축음(蓄音)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말을 하다 다 못하고 죽고, 그 말은 끊기지만 그 말한 만큼에 담긴 하느님의 뜻이 남는다. 그것이 전승되고 전파되고 하느님 말이 쌓인다고 류영모는 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믿음이며 사상이며 철학이며 지혜의 실체다.
인간의 말은 덧없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을 준 것이 신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신에게서 빌린 입으로 하는 것이다. 죽으면 그 입이 사라지지만, 입이 한 말은 하느님의 말 속에 돌아가 합류한다는 생각. 류영모가 얼마나 말을 귀하게 여겼으며, 그 말 속에 곧 신의 뜻이 존재함을 간절하게 믿었는지 깨닫게 하는 한편의 시다. 지금 그 입으로 하는 말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하며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인간이여. 다석은 이렇게 신앙을 강의하고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