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1)] 광주역에 내린 류영모가 만난 그 눈빛

2020-08-26 09:01
여순사건 고아들을 맡다, 이현필 '동광원 운동'

이세종을 성인이라 호칭한, 다석

이세종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산 것이 내게 붙어있다. 그것이 떠나면 나는 죽는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살 것이요, 하느님께서 내게서 당신의 선한 것을 도로 찾아 가시면 그때는 찌꺼기 밖에 남지 않으니 나의 육체도 살 수 없어 죽고 마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것을 죽었다고 한다.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서 맑은 것을 도로 찾아가시므로 남은 것은 썩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썩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무를 불에 태워버리면 그 나무는 죽은 줄로 알지만 태운 재를 거둬 다른 나무에게 거름으로 주면 그 비료 성분 덕택으로 잘 산다. 그 나무가 죽었다고 해서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육체도 이와 같다."

류영모는 이현필과 함께 이세종이 살던 화순군 도암면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세종을 '성인'이라고 호칭했다. 류영모의 말. "성인은 무엇인가. 물질에 빠지고 미끄러지는 나를, 물질을 차버리고 깨끗해져 보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내 위에 누가 있으랴 하는 자는 지각이 없기로 마치 철없는 사람과 같다. 자기 머리가 가장 위인 줄 알고 일을 저지르니 못되고 못난 짓이 될 수밖에 없다."

이세종의 사상은 류영모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류영모가 '성인'이라는 호칭을 서슴없이 붙인 것은, 그가 인간 속의 짐승 본능인 탐진치(耽瞋痴) 욕망을 완전히 끊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류영모가 얼나의 길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데에는, 거침없이 깨달음의 길을 걸어간 선각(先覺)의 결행이 하나의 의미심장한 표지판이 되어줬을 것이다. 거기에 이세종의 제자 이현필이 두 성자의 영적 가교(靈的 架橋)가 되어주었던 점도 특기할 만하다.

광주에서 이세종이 죽기 한달 전인 1942년 1월 4일, 서울의 류영모는 중생(重生, 거듭남)을 체험하고 있었다. 하느님을 생전에 느끼는 파사(破私)에 든 것이다. 류영모가 '십자가에 기대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신앙'을 말했을 때, 이세종은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이 없다, 행위를 고치고 어려움을 참고 거듭난 생활을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다"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핍박받는 식민지 조선의 남쪽과 북쪽에서 놀랍게도 서구 기독교의 영성이 그 원형의 뜻을 돋우며 피어오르고 있었던 셈이다. 이 '기적'의 시대, 뜻밖의 심오한 역사를 우린 잊을 수 없다.

 

[이현필]



이승훈과 나란히 놓은 이현필

1972년 10월 22일 류영모는 '다석일지'에 이런 시를 남겼다.

前後來避六十四(전후래피육십사)
降昇三月二五木(강승삼월이오목)
北李南李交柳際(북리남리교류제)
三合參與玄啓明(삼합참여현계명)

앞뒤로 오고 갔네 64년에
승훈은 3월25일 목요일에 내려왔지
북쪽의 이선생과 남쪽의 이선생이 류영모와 교제했네
세 사람이 현동완과 함께 계명산에 있었네

아마도 호남(광주 방림동)의 동광원 분원인 경기도 벽제 웃골의 계명산 수녀촌에 다녀온 기억을 떠올리며 쓴 시였을 것이다. 북쪽의 이군은 이승훈이고 남쪽의 이군은 이현필이다. 이승훈은 1864년에 났고 이현필은 1964년에 세상을 떴다. 첫행은 그 우연한 일치를 말한 것이다.

두번째 행에는 류영모의 기지가 발휘된다. 강승(降昇)은 내려오고 올라감(태어나고 죽음)이란 뜻이지만, 승(昇)은 이승훈의 '승'자이기도 하다. 이승훈이 탄생한 것은 3월 25일 목요일이었다. 여기에 다시 이현필을 끼워넣었다. 이현필이 죽은 것이 3월 18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행을 조금 늘릴 수 있었으면, 강승삼월이오목일팔수(降昇三月二五木一八水)라 했을 것이다. 3월 25일 목요일에 태어났고 3월 18일 수요일에 돌아갔지. 이승훈의 탄생과 이현필의 죽음이 있던 그 봄날을 함께 기린 행이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함께했던 이승훈, 그리고 호남의 광주와 경기도 벽제 동광원에서 함께했던 이현필. 이 두 사람을 만난 것이 류영모에게 얼마나 귀한 일이었는지를 새긴 시다. 그와 더불어 현동완이 함께했음을 기록해 놓았다. 류영모의 사상과 신앙의 고귀한 인연들을 아로새겨놓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오산학교 인연을 맺게 해준 이승훈의 비중만큼이나 이현필을 중요한 사람으로 올려놓은 것은, 새삼 이 사람을 다시 살피게 한다. 이세종의 제자였던 이현필(李玄弼)은 누구인가.

이세종,이현필,최흥종,강순명의 인연

이현필은 1913년 1월 28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혹은 권동리)에서 부친 이승로-모친 김오산 사이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지만, 부친의 사업 실패로 살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는 힘겨운 시절을 겪었다. 천태보통학교에서 4년간 공부를 한 것이 그가 학교맛을 본 전부였다.

12세 때인 1925년 돈을 벌기 위해 나주 영산포로 갔다. 거기서 닭장사를 시작했다. 그 무렵 일본인 스나가미(管波)가 세운 교회에 가게 됐다. 스나가미는 무교회주의 우치무라 간조를 따르던 교인으로, 조선에서 대서업을 해서 번 돈으로 영산포에 교회를 차렸다. 소년 이현필은 이곳에서 곽신천 전도사를 만났고 기독교와 예수를 접하게 된다. 그는 교회 유년주일학교 교사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2년 뒤 영산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인근 다도면에도 교회가 있었는데, 그것이 방산교회였다. 이곳에서 이현필은 이세종을 만난다. 14세 소년이 48세 중년의 스승을 만난 것이다. 이세종은 도암면 등광리 뒷산인 천태산 기슭에서 수행을 하면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방산교회를 가끔 방문하곤 했다.

소년은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저 분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공(李空)이라고 불러. 빈껍데기라는 뜻이지. 저분도 예수를 믿는데, 신약과 구약 성경만 읽는다고 해. 아무리 몸이 아파도 약을 쓴 적이 없고, 풀 한 포기라도 살생은 절대 안한다더군. 원래 머슴살이를 했는데, 그렇게 벌어놓은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줬지. 자기 아내 순희를 누이로 부르면서 평생 범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낸다더군. 신사참배도 거부하고 산 속에 숨어 산다네." 이세종에 관한 이야기들은, 도무지 이 세상 사람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이현필은 화순 등광리에서 4년간(1928~1932) 이세종의 가르침을 받는다.

사람들은 이세종을 '천태산의 성자'라 불렀다. 많은 이들이 그의 소문을 듣고 가르침을 얻으려 찾아왔다. 1932년엔 최흥종과 강순명이 찾아왔다. 최흥종은 이세종보다 한 살 아래로 당시 52세였다. 강순명은 최흥종의 사위로 34세였다. 이현필은 19세였다.
 

[최흥종]



최흥종이 이현필 학교 알선

당시 나환자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최흥종은 광주나병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듬해에 나환자 500여명을 이끌고 광주에서 서울 조선총독부까지 15일간 '나환자 구하기'행진(구라(救癩)행진)을 벌이게 된다. 강순명은 4년전인 1928년 '독신(獨身)전도단'을 만들었고, 1932년 고든 애비슨이 설립한 광주농업실수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세종의 천태산에 모인 그들은 창세기 1~3장의 에덴동산 주제의 해석을 놓고 논쟁을 벌인다. 이 자리에서 최흥종과 강순명은 이세종의 제자 이현필의 출중함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이현필을 농업실수학교 기숙사에서 공부를 하도록 했고, 강순명의 독신전도단에서 일하도록 했다.

독신전도단은 1928년 7월에 설립된 단체다. 강순명은 이 당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해혼(解婚) 운동의 영향을 받아, 20여명으로 광주 독신(獨身)전도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광주내 기독교단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1934년 순천으로 본부를 옮긴다. 20대 초반이 된 이현필은 이 단체 속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순천으로 따라가지는 않았고, 광주의 재매(재뫼)교회(현재의 신안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면서 3년간 교회 기독교 생활을 한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심해지면서 교회 일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이현필은 서울로 갔다. YMCA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야간부 영어반 공부를 했다. 이 영어반에서 원경선(풀무원 설립자)을 만났다. 또 YMCA에서 현동완과 류영모를 만났다. 1936년에서 1938년까지 2년여간 20대 이현필은 40대의 류영모를 만나, 그 영적인 감화를 받았다.

여순사건 뒤 고아들을 받은 동광원

이후 다시 광주로 내려가 결혼을 한다. 신부는 백영흠 목사의 처제 황홍윤이었다. 독신과 동정을 강조했던 스승 이세종의 가르침을 벗어난 결행이었다. 1940년 아내가 임신했다. 그런데 자궁외 임신이었다. 아내의 목숨이 위험했으나, 선교사(존 프레스턴 주니어)의 도움으로 아내를 살렸다. 아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27세 남편 이현필은, 24세 아내와 해혼을 선언했다.

그해 그는 도암면 청소골 꾹골의 마당바위 위에 앉았다. 이현필의 영적인 고뇌가 깊이 진행되고 영글었던 그 자리다. 1943년 이현필은 남원의 삼일목공소(장인 백영흠의 친척이 운영하던 곳)에서 성경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남원에 이름없는 공동체가 생겼다. 움막을 짓고 모여 살면서 농사를 지으며 성경공부와 수행생활을 하는 '이현필 운동'이 시작됐다. 1947년 9월 남원 골짜기의 서리내(선인래)에서 어린 소년 7명과 소녀 7명을 모아 성경을 가르친다. 아이들은 움막을 스스로 지었고 풀뿌리와 쑥, 쌀가루를 탄 물로 허기를 채우면서 공부했다. 또 남원군 수지면 갈촌마을 뒷벌(서리내에서 10여㎞ 떨어진 곳)의 '갈보리'에서도 성경 강의를 했다.

이현필 운동이 제대로 펼쳐진 때는 동광원-귀일원(歸一院)시대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났고 1949년 4월 반란군 주도 혐의자들이 사살됐다. 이후 부모 잃은 고아들이 쏟아져 나왔다. 목포에서 고아원을 하던 윤치호는 광주YMCA 정인세(총무)를 찾아 고아원 운동을 제안했다. 광주를 중심으로 저명인사 70명이 모였다. 길거리의 아이들을 거둬들여 제대로 키우기 위한 그 운동을 '동광원'이라고 불렀다. 정인세는 동광원 운동을 이현필과 손잡고 했으며, 실제 모든 실무활동은 이현필과 그의 제자들이 했기에 동광원은 이현필의 운동단체로 알려지게 됐다. 당시 이현필은 화학산 소반바위 밑에서 묵언수도를 하며 깨달음을 얻어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구일원이다. 동광원과 구일원은 동일한 것을 가리키는 두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동광원은 고아사업을 위해 시작됐지만, 이후 기독교 수도단체로 나아갔다. 1990년 현재 동광원 회원은 전국에 200명 정도 된다. 광주 방림에 본원이 있고 분원은 전남 곡성, 함평, 진도, 도암, 전북 남원, 전주, 광주자매, 무등산 단체가 있고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산, 갈월에도 있다. 동광원 회원들은 노동 수도(修道)를 하며 농사로 자급자족한다. 어떤 원조도 받지 않으며 자활생계를 한다. 교회 예배에 나가지 않는 이들은 기성 교회에서는 산중파, 금욕주의자, 이현필파로 불리며 이단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다석 류영모]



류영모와 이현필의 만남

1946년 광주YMCA 총무인 정인세는 서울에 와서, 서울YMCA총무인 현동완에게 이현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정인세는 이현필을 보기 드문 기인(奇人)으로 소개했다. 현동완은 류영모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광주에 가서 강연도 하고 이현필도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이리하여 그해 봄날 광주YMCA에서 류영모 강연이 잡힌다. 당시 광주YMCA 이사회 회장은 최흥종이었다. 류영모와 현동완은 호남선 열차를 타고 광주역에 도착했다. 역사에는 정인세와 이현필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류영모와 이현필은 정중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서로의 눈빛을 깊이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두 사람은 그렇게 서 있었다. 강연시간이 촉박하였기에 서둘러 일행은 충장로의 YMCA로 향했다. 앞에는 류영모와 이현필이 걷고 뒤에는 현동완과 정인세가 걸었다. 류영모와 이현필이 말없이 걷자 따라오던 현동완과 정인세도 묵묵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득 류영모가 입을 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