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9)] '얼나 사망' 조의(弔意)를 표함
2020-08-14 10:39
해방 이후 김교신의 후임, 노평구(盧平久)…류영모를 알았지만 몰랐던 사람
얼나의 죽음을 슬퍼함
류영모가 남긴 시 중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은, '대동조(大同弔)'가 아닐까 싶다.
고대왕국의 국가관에서 형성된 관념인, 충효(忠孝)사상은 국가에 충성하는 것과 육친에게 효도하는 것을 상응하는 가치로 연결해놓았다. 화랑도 세속오계의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 군주를 섬김)과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도로 어버이를 섬김)는 국가 권력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강조되어 왔다.
여기엔 일정한 '트릭'이 있다.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이지만, 백성이 군주를 섬기는 것은 인위적이고 사회적으로 학습된 가치로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을 하나로 묶어 놓음으로써, 충성의 가치를 혈연의 가치와 같은 수준으로 당위화(當爲化)해놓은 것이다. 즉 충성은 자연스러운 가치가 아니며, 국가 지배를 위해 권력자의 필요에 의해 조성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효(孝)와는 다르다.
류영모는 효(孝)라는 감정이, 오히려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유대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신의 독생자(獨生子, 모노게네스)인 인간 예수는 아버지로서의 하느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효(孝)로 유추될 수 있는 관계감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천부(天父)를 향한 인간이 지니는 귀속감과 합일감의 정체가 부자(父子)간의 친밀로 환유(換喩)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그의 한시 '대동조'는, 아버지 하늘과 아들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신앙'을 파격적이면서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대동(大同)'은 온 우주이며 하느님이기도 하다. 조(弔)는 '죽음을 슬퍼함'이란 뜻이다. 누가 죽었는가. 인간 속의 신이 죽었다. 대동조는 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다. 날마다 신을 향한 생각을 돋워온 그가 왜 이런 역설적인 제목의 시를 썼을까. 우선 한번 읽어보자.
온 우주가 천부친상(天父親喪)을 슬퍼함
스스로 도달함이 없는 자는
필시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부친상을 당하고도 도달함이 없으면
필시 그 스스로가 벌한 것이다
大同弔(대동조)
未有自致者(미유자치자)
必也親喪乎(필야친상호)
遭艱猶未致(조간유미치)
必也自處乎(필야자처호)
미유자치자(未有自致者)는 누구인가. 스스로 닿지 못한 사람이다. 치(致)는 닿는 것이다. 저절로 닿는 것이 아니라, 애를 쓰거나 고생을 한 끝에 닿는 것이다. 치명(致命)이란 말이 있다. 목숨의 끝에 이른 위험이나 위기를 말한다. '죽을 지경'이라고도 한다. 치명은 하느님과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류영모의 '치(致)'는 바로 치명이다. 하느님에게 마침내 닿는 일이다. 스스로가 신에 닿는 것이 자치(自致)인데 이것이 안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생각 속에 있는 '얼줄'을 쥐지 못했거나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얼줄을 놓아버리면, 신이 그에게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야할 그가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이니 바로 친상(親喪)이다. 천부친상(天父親喪)이거나 천친상(天親喪)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놓아버렸기에 하늘 아래 둘도 없는 큰 상을 당한 것이다.
조간(遭艱)은, 부친상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 부친상을 당하고도 하느님의 죽음을 모르는 이가 있다. 이런 고아를 하늘은 버리지 않고,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를테면 패자부활전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시련과 어려움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부당하게 여기며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을 끊어버린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형량을 구형하는 모양새다. 하늘이 처벌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신의 아들에서 떨어져 나가 천애의 고아로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해야겠는가. 하늘은 그저 가만히 슬퍼하며 다가오지 못한 아들을 슬퍼한다. 必也自處乎(필야자처호)가 무서운 말이다. 하느님이 처벌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하느님 자식이 되지 못하도록 처벌한 것이다.
천부친상(天父親喪)은 하느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 속에 깃든 얼나, 그 성령이 돌아갔다는 얘기다. 하느님과 연결이 끊긴 것을 온 우주가 슬퍼하는 것이 대동조(大同弔)다. 믿음이란 이런 것이며 사상이란 이렇게 비장한 것이다. '얼나 사망' 부고에 조의를 표하는 시를 쓴 류영모.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류영모는 '인간 안의 신(얼나)은 죽었다'고 슬퍼했다. 그의 치열함은 이러했다.
예수는 "멸망의 육체를 버리고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말했다. 류영모는 저 말을 풀어 설명했다. "성령은 영원한 생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성서(누가 15장)의 탕자처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가기만 하면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생명인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우리의 정신을 깨치고 나면 그때에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을 받습니다."
이제, 류영모와 조금 다른 길에 섰으나 서로에 대한 깊은 경모(敬慕)를 지녔던 김교신의 미션을, 해방 후에 이어갔던 한 신앙인을 만나러 가자.
김교신 성서연구를, 해방후 이어간 노평구
김교신과는 깊은 교분을 지녔던 다석 류영모는, 김교신의 사상과 활동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노평구(盧平久, 1912~2003)와도 교유하게 된다. 노평구는 김교신이 죽고난 뒤, 즉 해방 이후 1946년 11월에 '성서연구'를 창간해 1999년 종간호까지 53년간 이 잡지를 내면서 한국의 무교회 신앙을 주도해왔다. 34세에 시작해 죽기 4년 전인 87세까지 이 일을 했으니, 거의 평생의 사업이었다.
노평구는 함북 경성(鏡城) 출신으로 1930년 어랑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200명의 학생과 함께 항일시위 행진을 주도한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이 공훈을 기려 1995년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는다. 그러나 그가 삶의 거의 전체를 기울여 매진했던 일은 진리 탐구였다. 그는 교회의 제도적 억압에 맞서 싸운 마틴 루터처럼 살고자 했다. 노평구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설명했다.
"소학교는 동맹휴업으로 졸업을 못했고, 중학교는 광주학생사건으로 끝을 못 맺었다. 또 대학은 입시 낙제했다. 성서연구는 나 같은 인간의 찌꺼기가 아니면 끌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믿음의 체험과 순종의 생활이다. 나의 죄의 문제의 해결, 예수의 십자가에 의한 양심의 고민에서의 해방이다."
류영모는 기독사상가 아닌 인생철학가?
1970년대 후반 종로 YMCA. 노평구의 성서모임에 류영모가 참석했다. 노평구는 강의를 끝낸 뒤 뒷자리에 앉은 류영모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청했다. 류영모는 강단으로 나와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man human humane" 그는 인간과 인성(人性)과 인성(仁性)을 뜻하는 세 낱말을 통해, 인간의 영적 성장을 가리킨 것이다. humane은 예수의 사랑이며 부처의 자비이며 공자의 인(仁)이다. 인간은 어느 지점에서 하느님을 만나는가. human(휴먼)에서 e가 나와 humane(휴메인)이 되는 순간이다. 신앙의 목표는 이것 외에 있을 수 없으며, 수행의 핵심은 여기에서 벗어나선 안된다는 통찰을 보여준 대목이다. 노평구는 그러나, 류영모가 열어놓은 기독교사상의 지평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노평구는 1995년 11월호 '성서연구'에 <김교신 류영모 함석헌 선생에 대한 나의 신앙증언>이란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류영모에 대한 부분을 추려보면 이렇다.
<김교신이 말하기를 '어제 너희들과 자하문 밖 류영모 선생 댁에 가서 들은 이야기는 기독교는 아니고 인생교훈, 처세훈인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때 나는 속으로 류영모 선생은 고명(高名)하신 어른이구나 했던 것이다.
한번은 YMCA에 있었던 류영모 선생의 요한복음 강의에 나갔다. 김교신 선생이 존경하는 분이고 함석헌 선생의 은사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용은 석가 공자 노자 예수 등의 말씀으로 하시는 인생철학 같기도 하고 신앙적으로 싱크레티즘 혼합종교로구나 하고 다시는 나가지 않았다.
나의 졸지(拙誌) 창간호를 가지고 류영모 선생을 찾았는데 그때 선생은 자신의 뒷골을 만져보라고 하시며 이렇게 뒷골이 나온 사람은 색골(色骨)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류 선생은 금욕주의의 톨스토이를 존경한다고 했다. 나는 돌아오면서 생각하기를 '역시 선생은 불교적인 금욕사상가이시구나'라고 했다. 기독교는 가톨릭이면 몰라도 금욕주의는 아닌데, 하기도 했던 것이다.
김교신 선생 추억집 개판시 류영모 선생께 부탁한 글을 받으러 갔을 때다. 선생은 오늘 그대에게 '영(靈)'자 풀이를 하겠는데 기독교의 성령과 어떤가 들어보라고 하였다. 벽의 종이에 써 가면서 두 시간 가까이 '영'자를 풀었다. 나는 들으며 한자를 지으면서 그런 깊은 뜻을 담았나 했다. 나는 돌아오며 그 '영'은 젊은 여자가 접신하며 무당이 되는 것을 보았던 나는, 그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류영모 사상에 닿지 못한 노평구
노평구는 류영모 사상에 대해 비판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수준이 피상적이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김교신의 후계자마저도 이 정도로 류영모를 생각했을 만큼, 그의 자율 기독교 사상은 시대의 무지와 외면 속에 박제(剝製)되어 있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이 이는 대목이다.
김교신이 노평구에게 말했다는 말부터 짚어보자. '류영모의 담론'은 기독교가 아니라 인생교훈이며 처세훈이라고 규정한 김교신의 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김교신의 '신앙적 관점'에서는 류영모가 존경스러운 인물이기는 했지만 기독교적인 사상을 지녔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파격적이고 상궤를 이탈해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김교신과 노평구는 교회 중심으로 번성해온 서구기독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었지만, 그 교리를 형성한 성서 속의 '과장과 왜곡'의 실체를 정면으로 문제삼을 힘을 갖추지는 못했던 것 같다. 서구 기독교가 사실상 기독교가 설파했던 신의 실체를 놓치고 인간 본위나 편의의 '반기독교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 왔다는 점에 대한 깊은 반성 또한 얻을 수 없었다. 거기에, 류영모가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지닌 신격(神格)에 대한 보편성을 포착하고 절대의 진리가 '하나'임을 추구하는 놀라운 핵심사유를 온전히 이해할 리 없었다. 다만 외형만으로 짐작해서 싱크레티즘을 거론하며 '이단적 특징'으로 읽어내려고 한 것이다. 류영모는 "사상적으로 교회와 다를지 모르지만, 예수와는 일치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곤 했다. 오히려 예수와 멀리 떨어져나간 것은 교회와 교의신학일지도 모른다.
육신과 영(靈)…신은 어디에 있는가
류영모가 자신의 뒷머리를 만지며, 색욕이 강할 수 있는 육체적 특징을 타고 났다고 말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그가 색욕과 그토록 단호하고 격렬하게 싸우며 날마다 실천했던 것은, 그런 자신의 '짐승'을 제어해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반영한 것이었다. 여전히 '십자가신(神)'이나 인격신에 기대는 일부 '정통'기독교의 주술(呪術)과 기복(祈福)은 여전히 육체를 믿는 신앙에 가깝다. 노평구는 류영모의 말을 들으면서, 기독교가 과연 '금욕'을 추구해왔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고개를 흔들고 있다. 본질과 지엽을 구분 못한 것이다. 금욕이 단순히 고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욕망의 육신이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이라는 '근원적인 사유'를 노평구는 읽어내지 못했다.
영(靈)이란 말에 관해 묻는 류영모와, 그것에 반응하는 시큰둥한 노평구의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노평구에게 영(靈)은 '젊은 여자가 접신하여 무당이 되는' 이상하고 섬찟한 무엇일 뿐이었다.
류영모는 인간의 생각 속에 하느님의 생명인 영이 들어와 있다고 보았고 그것을 성령 혹은 얼나라고 불렀다. 예수 또한 마리아 속에 성령이 들어와 잉태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예수 속에 성령이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활'의 개념은, 육신의 부활이 결코 아니며, 하느님의 생명을 받는 성령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류영모는 생각했다. 영(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하느님과 만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육신 속에서 피워올린 생각의 불꽃이 신의 생명력과 합일하는 그 기적을 향해 하루살이로 전진했던 류영모가, 노평구에겐 재래신앙의 무당 이미지로 밖에 해석되지 못했다.
그 사상의 불통(不通)에 대해 류영모는 일체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다만 "노평구 그이도 꽤 애쓰지요"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