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6)] 스승과 같은 날 죽고싶었던 함석헌

2020-07-20 09:53
류영모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바보새, 36년 인연



함석헌이 몰래 봤던, 류영모 교장실

"한번은 선생님 방 앞을 슬쩍 지나다보니 방문이 좀 열렸는데, 벽에다 큰 글씨로, (아마 한자가 손바닥보다도 더 크게) "夜靜海濤 三萬里(야정해도 삼만리)"라 써 붙인 것이 보였습니다. 선생님이 손수 쓰신 것으로 아는데, 그때는 나도 왕양명(王陽明)을 읽지 못해 그것이 그의 글인 줄도 몰랐지만,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그것을 쓰셨을까 혼자 생각을 해 본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들어가서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1983. 10.18)

함석헌이 1983년에 류영모 스승을 추억하며, 고교시절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가 스승을 존경하며 교장실을 서성거리는 모습도 인상적이고, 그 무렵 수줍음을 많이 탔던 그가, 대자(大字)로 써서 교장실 벽에 붙인 글씨의 내용을 궁금해 하면서도 감히 묻지도 못하는 모습이 눈 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다.

소년 함석헌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저 시를 속시원히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 시는 왕수인(王守仁, 호는 양명(陽明), 1472~1528)이 쓴 '바다 위에 떠서(泛海, 범해)'라는 작품이다.

險夷原不滯胸中(험이원불체흉중)
何異浮雲過太空(하이부운과태공)
夜靜海濤三萬里(야정해도삼만리)
月明飛錫下天風(월명비석하천풍)

험하고 평탄한 것 따위 원래 가슴에 담아두지 않거늘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밤은 고요한데 바다의 파도는 삼만리에 이르고
달은 환한데 고리 쩔렁거리며 날릴듯한 지팡이는 하늘 바람 아래에 있네

호쾌한 기상을 담은 시원스런 시다. 중국이 대륙으로 된 곳인지라 바다여행을 담은 노래가 많지 않기에 드물게 보는 작품이다. 지금 배가 출렁거리고 있어서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인데,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셀프최면'을 걸고 있는 듯한 구절이 인상적이다. 내 본시 죽거나 살거나 별로 개의치 않거늘 뭘 이 정도의 파도에 겁을 낸단 말인가? 하는 기분의 두 구절을 뽑은 뒤, 눈앞 전후좌우로 펼쳐진 웅대한 풍경을 그려놓았다. 사방엔 뭍도 섬도 보이지 않는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 있고, 큰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데 지팡이(석장,錫杖)에 붙은 쇠고리가 쩔렁거릴 만큼 바람이 세차다.

다석 류영모는 이 시 중에서, 위태로운 상황들을 다 걷어내고 달빛 아래 바다 삼만리를 둘러보는 호연지기의 구절을 뽑아 교장실에 붙여놓았다. 당시 오산학교의 분위기와 스승들이 후세에게 기대를 걸며 나라의 꿈을 키운 자취를 엿볼 수 있다. 비록 밤길을 바다 위에 출렁거리고 있지만, 언젠가 날이 밝고 우리의 땅에 닿으리라. 그런 마음으로 이 글귀를 썼으리라. 함석헌은 그 염원과 기운에 대해선  알지 못했지만 그 글씨의 기운과 류영모의 고결한 풍모에 감동한 셈이다. 

함석헌의 '소롯길' 지나면, 류영모의 산

류영모가 그의 사상을 가장 깊고 오래 교유한 두 사람을 들라면, 김교신과 함석헌일 것이다. 류영모는 1890년이고 김교신과 함석헌은 1901년생이다. 류영모와 김교신은 1927년부터 1945년까지 18년을 함께 했고, 류영모와 함석헌은 1921년부터 1957년까지 36년간 사제(師弟)의 정을 나눴다고 할 수 있다. 그 기간으로만 볼 때, 김교신은 단명(短命)으로 일찍 보냈지만 함석헌과는 오랫동안 사상적 동행자로서 깊은 소통을 할 수 있었다.

특히 함석헌은,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를 따르다가 류영모의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무교회주의의 '십자가 신앙'을 벗고, 주체적 자율적 신앙과 문명적 비전을 결합한 독창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의 길을 걷는다. 함석헌을 이해하는 것은, 류영모에 닿는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소롯길을 만나는 것과 같다. 36년간 서로 오가며 반들반들하게 닦인 길이 거기 놓여있다.

2008년 서울서 열린 세계철학대회에서 근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소개된 두 사람은 류영모와 함석헌이다. 함석헌은 다석1주기에 다석선생의 집에서 가진 추모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족하지만 이만큼 된 것도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류영모와 함석헌은 같은 날(3월 13일) 태어났고 하루 차이(류 2월 3일, 함 2월 4일)로 돌아갔다. 박재순(함석헌의 제자)에 의하면, 함석헌은 운명하기 전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스승 류영모가 돌아간 날과 날짜를 맞추려는 듯이 말이다.
 

[류영모와 함석헌. 류영모 뒤에 선 사람은 김흥호.]



류영모 때문에 바뀐 그의 인생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의 삶을 일별해보자. 그는 평안북도 바닷가 용천에서 부친 함형택과 모친 김형도 사이에 3남2녀 중 누님 아래 둘째로 태어났다. 5세 때 천자문을 외웠고 6세에 기독교 계통의 덕일소학교에 입학한다. 9살 때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았고, 어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14세에 양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6세에 졸업한 뒤 의사가 될 꿈을 꾸며 평양고보에 입학했다. 2학년이 되던 해인 17세 때 한 살 아래인 황득순과 결혼한다.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집에서 만세운동 이후의 나라를 지켜보면서, 젊은 가슴속에 일어나는 격정과 분노를 삭이기 어려웠다.

1921년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서 서울로 왔다. 그때가 4월이었는지라 입학시기가 지나 들어갈 수 있는 학교가 없었다. 그 무렵 길을 걷다가 집안의 형뻘인 함석규 목사를 만나 얘기를 나누던 끝에 오산학교 입학 추천서를 받게 된다. 그 편지를 들고 그는 정주로 갔고 3학년에 편입된다. 그해 여름이 지났을 때 류영모가 교장으로 부임한다. 1921년 9월 개학식 때 그는 류영모를 처음 만났다.

이후 함석헌은 삶의 목표를 바꿨다. 의사가 되기로 한 꿈을 접고, 이 나라를 위해 뭔가 새로운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류영모를 통해 노자를 읽게 되었고, 남이 이미 마련해놓은 교리를 따르는 종교가 아니라 좀 더 참되고 자율적인 믿음을 찾게 되었다. 그는 이 무렵 류영모 교장을 따로 뵙고 싶어서 교장실 문 앞까지 가서 감히 문고리를 돌리지 못하고 돌아온 일이 있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함석헌은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었다. 그러나 1922년 여름 류영모가 오산학교를 떠날 때, 밤길을 동행하며 전송해준 학생도 함석헌이었다. 이때 류영모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함군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 오산학교에 왔는가 보네."
 

[함석헌]

1923년 함석헌은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 입시준비를 위해 정칙(正則)학교에 다니던 9월 관동대지진으로 도쿄의 3분의 2가 불타버렸다. 일본은 민심을 돌리는 책동으로 '조선인이 폭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후 조선인 6000명이 학살되었다. 함석헌은 일본경찰에 이미 체포되어 유치장에 있는 바람에 죽음을 면했다. 일본 당국이 일본의 살귀(殺鬼)들을 막아 조선인인 그를 살려준 셈이었다. 이 구사일생(九死一生)은 그에게 삶과 죽음을 더욱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도쿄고등사범학교(교육대학)에 입학했다. 이때 찾아간 교회에서 김교신을 만났고, 류영모가 언급한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참석한다. 함석헌은 이 때, 자신이 조선에서 할 일이 '참된 기독교와 성경읽기'에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역사교사가 됐다. 그런데 역사를 가르치면서 부끄러움이 일었다. 한국역사가 '비참과 수치의 연속'이어서 뭘 가르쳐야할지 난감했다. 고심 끝에 역사교육의 원칙을 세웠다. 첫째 민족을 버려선 안되고, 둘째 하느님을 버려선 안되고, 셋째 과학과 세계국가주의를 버려선 안된다. 마지막 항목은 영국 역사가 H.G. 웰즈(Herbert George Wells, 1866~1946)의 <세계사개요>(The Outline of History)를 읽은 뒤의 선택이었다.

이후 김교신이 내는 '성서조선'에,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한다. 이 글은 나중에 다시 정리되어 <뜻으로 본 조선역사>라는 개정판으로 나온다. 함석헌의 이 글은, '성서에서 고난을 받는 메시아가 영광의 메시아라면, 조선의 고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없나'하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는 한국역사의 핵심을 '고난'으로 보는 역사관을 세운 것이다.

우치무라에게 배운 '무교회'

오산학교에 있으면서, 그의 무교회주의 신앙에도 새로운 자각이 생겨났다. 무교회가 하나의 교파로 굳어가는 점에 대해 우려가 생겼고, 우치무라의 십자가 대속신앙(인류의 죄를 속죄하려 예수가 죽음을 맞은 십자가 상징을 경배하는 신앙)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다. 류영모의 길로 조심스럽게 방향을 바꾼 셈이다. 그는 그러나 신앙교육을 통해 농촌과 겨레를 살려내고자 하는 애국적 신념은 꾸준히 유지했다. 1938년 봄 함석헌은 학교를 간섭하는 식민지 정책에 맞서려다가 한계를 느끼고 오산학교를 떠난다. 그는 "눈물로 교문을 나왔다"고 술회한다.

1940년 3월 김두혁이 평양 근교에 설립한 덴마크식 송산농사학원을 맡게 되었다. 그해 8월 일본 도쿄에서 터진 계우회(鷄友會, 도쿄대 농학부의 조선인 학생 독립운동 단체) 사건으로 김두혁이 검거되면서 함석헌도 함께 구속됐다. 송산학원에는 양정고보 출신 박동호도 함께 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함석헌이 구속된 뒤 학원을 운영할 수 없어서 서울로 왔다. 박동호는 김교신의 집에 머물면서 구기리의 류영모를 찾았다. 함석헌의 근황을 들은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 하는 기도는 영원한 생명만 구해야지 세상 일을 어찌해 달라는 건 참기도가 못됩니다. 하지만 함석헌이 구속되었다 하니 하느님께 기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김교신은 이 일을 박동호로부터 전해듣고 일기에 적어놓았다. "경애하는 함석헌형이 일을 당한 뒤로 매일 몇 차례 함형을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기도 안 할 수 없으니 하노라고 하였다 한다."

함석헌은 1년간의 투옥 중에 부친상을 당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다시 1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감옥살이를 통해 얻은 것이 많았다고 했다. 특히 "모든 종교는 궁극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깨달음을 만난 것도 감옥 속에서였다.

해방 뒤 함석헌은 임시자치위원장과 평안북도 교육부장을 맡기도 했다. 신의주 학생시위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감옥에 두 차례 투옥된 뒤 그는 1947년 3월 17일 북한을 탈출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함석헌의 월남을 가장 반긴 사람은 류영모였다. 생사조차 몰랐던 제자의 귀환이었다. 이후 함석헌은 류영모의 YMCA 연경(硏經,성경연구) 강의를 빠짐 없이 들었다. "매주 스승님만큼 정신적인 생산을 많이 하는 이는 본 적 없습니다." 함석헌은 혀를 내둘렀다. 류영모의 '노자'와 '중용' 강의는 구기동 집에서 했는데, 함석헌은 오류동에서 구기동까지 걸었다. 김흥호, 이철우도 구기동 강의에 참여했다.

서영훈(1920~2017)이 청소년 적십자 국장으로 있을 때인 1953년, YMCA에서 하는 류영모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당시에 함석헌을 존경하여 그를 찾아왔다가 류영모 강의를 듣게 되었다. 서영훈이 묘사해놓은 그때의 장면이 생생하다. "그때 한국전쟁에서 막 수복한 뒤라 가건물인 조그마한 판잣집 방에 10여명이 앉아있었습니다. 가운데 앞에서 말씀하시는 선생님보다 더 긴 흰 수염을 기른 제자 함석헌 선생이 류영모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나도 함선생 옆자리에 앉아 류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첫 인상이 류선생님 말씀은 지식이 아니라 영감(靈感)에서 나오는 소리인 것을 직감했습니다. 높은 경지에 이르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연 선생님의 선생님이 되실 만하였지요."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