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4전5기' 中 민법전…중국인 삶 달라질까
2020-05-28 04:00
反우경화·문혁 등에 번번이 무산
개혁개방·시장경제 도입 후 탄력
"목숨도 당 소유"에서 상전벽해
개인권리 보호 강화, 이행이 관건
개혁개방·시장경제 도입 후 탄력
"목숨도 당 소유"에서 상전벽해
개인권리 보호 강화, 이행이 관건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일인 28일 민법전(民法典) 초안에 대한 표결이 이뤄진다.
전인대 전체회의에 상정된 안건이 부결된 경우는 없어 통과가 기정사실이다. 1949년 신중국 수립 이후 다섯 차례 시도 만이다.
인민의 목숨까지 국가 소유라고 주장하던 사회주의 국가가 개혁·개방 정책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한 뒤 드디어 개인의 다양한 권리를 명시한 민법을 제정하게 됐다.
중국의 민법전 초안은 총칙·물권·계약·인격권·혼인가정·상속·침권책임(권리침해책임) 등 총 7편에 걸쳐 1260개 조문이 담겼다.
많은 서구 국가의 민법전 조문이 2000개 이상인 걸 감안하면 갈 길이 멀다는 평가도 나오지만, 중국에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할 단일 기준이 마련됐다는 데 의의가 있다.
70년 가까이 이어진 민법 제정 노력이 왜 번번이 무산됐는지, 산고 끝에 빛을 본 중국 민법전의 주요 내용은 뭔지 살펴보자.
◆정치·경제 불안에 발목 잡혀
신중국이 수립된 지 5년 만인 1954년 헌법을 만든 중국은 같은 해 민법 제정 작업도 시작했다. 당시 전인대 상무위는 전담반을 구성해 1956년 초안을 완성했다.
다만 이 초안은 1922년 제정된 소련 민법전을 베낀 것으로, 친척과 혼인가정 문제가 빠지고, 물권은 제외된 채 소유권 규정만 포함되는 등 한계가 명확했다.
더불어 1957년 우경화 반대 투쟁, 1958년 대약진운동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입법 활동 자체가 중단됐다.
1960년대 들어 두 번째 시도가 있었다. 1962년 경제 정책 수정에 나선 마오쩌둥(毛澤東)은 "형법은 물론 민법도 필요하다. 무법천지를 막기 위해 법이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1964년 24장 262조의 새 초안이 나왔지만, 민법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마오쩌둥이 19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면서 입법 작업이 좌초됐다.
불안정한 정치 환경과 함께 시장경제 체제의 부재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왕 부총장은 "당시만 해도 인민들은 별다른 재산이 없었고 농촌에서는 대문도 잠그지 않고 살았다"며 "시장경제가 도입되기 전이라 상속 등 민법에 담길 내용들이 별로 쓸모가 없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되자 민법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했다.
1979년 11월 전인대 상무위원회가 민법전 초안 마련에 나섰지만 국유기업 개혁과 사유제 도입 등에 대한 반발이 컸다.
결국 1987년 민법전의 축소판인 9장 156조의 민법통칙을 시행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와 별개로 기술계약법과 대외경제계약법 등의 단행법이 공포됐다.
쑨셴중(損憲忠) 중국사회과학원 학부위원은 "많은 이들의 인식이 개혁·개방 이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며 "생명도 당의 소유인데 어떻게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술회했다.
2002년에도 1200여개 조문, 10만여자로 이뤄진 초안이 나왔지만 민법총칙과 회사법 등 기존 법들을 짜깁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쑨 위원은 "1988년부터 토지제도 개혁이 시작되고 부동산 시장까지 형성돼 있었는데, 2001년 제출된 초안은 토지 매매를 금지할 정도로 시대에 뒤처졌다"고 말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집권한 직후인 2014년 다섯 번째 민법전 편찬 작업이 시작됐다.
2017년 자연인과 법인, 물권, 민사 책임 등의 개념을 담은 민법총칙이 먼저 시행됐고, 지난해 12월 민법전 초안이 공개됐다.
전인대 전체회의에서 민법전 초안을 심의·의결한 뒤 본격 시행되면 기존 민법총칙을 비롯해 물권법과 계약법, 혼인법, 상속법, 입양법, 권리침해책임법 등은 모두 폐지된다.
◆태아도 소송 주체, 고리대 엄금
민법전 총칙은 태아의 민사상 권리를 명시했다. 태어나기 전이라도 유산 상속과 증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태아가 민사소송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조문도 넣었다. 예를 들어 태아의 엄마가 왕씨라면 '왕모 태아'로서 소송에 참여할 수 있다.
혼외자도 같은 권리를 갖는다. 왕이(王軼) 인민대 법학원 원장은 "태아가 어떤 배경에서 잉태됐는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와 상관 없이 모든 권익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상속편에서는 노인의 권리 보호가 강조됐다. 지난해 말 중국의 60세 이상 인구는 2억5388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8.1%에 달한다. 세계에서 노인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다.
민법전은 자녀가 아니라도 노인과 계약을 맺고 부양 책임을 지는 제도를 넣었다. 상속만 받고 부모는 모시지 않으려는 세태가 확산하고 있는 데 따른 조치다.
또 현행 상속법은 공증을 받은 자필·대필·구두 유언의 변경·철회를 인정하지 않지만, 민법전은 이 규정을 삭제해 사망 직전에도 언제든지 유언을 바꿀 수 있도록 했다.
이 밖에 기술의 발전을 감안해 영상 촬영 등 새로운 유언 방식도 수용했다.
계약편의 경우 고금리 대출을 명시적으로 금지했다. 연 36% 이상의 이자율은 무효로 간주하며, 최대 금리를 초과한 이자는 돌려받을 수 있다.
멍창(孟强) 베이징이공대 민법전연구센터 주임은 "경제 성장이 둔화하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높은 금리는 금융 부실과 사회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며 "국가 차원에서 고리대금업을 엄단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권편에 포함된 재미있는 조문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상업용 전단지를 부착해 발생한 수익을 집주인들의 몫으로 인정한 것이다.
선춘야오(沈春耀) 전인대 상무위원회 법제위원회 주임은 "부동산 관리 기업들이 거주민 공유 공간을 임의로 바꾸거나 엘리베이터에 전단지를 붙여 영리 행위를 하는 사례가 많다"며 "이렇게 발생한 수익은 합리적인 원가를 차감한 뒤 집주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희롱 처벌 강화, 이혼 숙려기간 도입
인격권편은 각 기관과 기업, 학교의 성희롱 방지 책임을 명확히 했다. 기존에는 고용주가 책임을 지는 것으로 규정, 학교에서 성희롱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학교 측의 책임을 묻기가 어려웠다.
생명 윤리를 더 존중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유전자, 배아 등과 관련한 의학·과학 연구 활동에 종사하는 자는 법률과 행정 법규, 국가 규정을 준수하고 인체의 건강을 해치면 안 된다'는 조문이 삽입됐다.
중국에서 '유전자 편집 아기' 등의 이슈가 계속 불거지자 이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이메일 주소와 이동 경로를 개인정보 범위에 포함시킨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개인정보 보호 범위를 넓힌 셈이다.
혼인가정편의 경우 이혼 숙려기간 제도를 처음 도입했다. 이혼율 상승은 중국의 사회문제 중 하나다. 2017~2019년 3년간 매년 400만쌍 이상이 이혼했다.
민법전은 혼인신고 기관에서 이혼 등록 신청을 받은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부부 가운데 어느 쪽이든 신청을 철회할 수 있다. 30일이 지나도 이혼증 발급을 신청하지 않으면 역시 이혼 신고를 철회한 것으로 간주한다.
멍창 주임은 "이혼 수속이 지나치게 간편해 충동적인 이혼이 많아지고 있다"며 "이를 감안해 민법전 초안에서 30일간의 이혼 숙려기간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고공 낙하물에 의한 상해 사고가 발생하면 물건을 던진 사람은 물론 안전 보장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건물주 등도 책임을 져야 한다.
만 8세 미만의 어린이가 모바일 게임 등으로 거액을 지출했을 때 부모는 게임 업체 등에 요청해 이를 돌려받을 수 있다. 8세 미만 미성년의 민사 행위 능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 부총장은 "민법전은 사회 생활의 백과사전과 같은 것"이라며 "이번 민법전 초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대적 수요와 사회적 수요, 시장 경제의 수요를 모두 수용하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