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정의 여행미학]세월의 더께 품은 중림동 골목 골목 배어든 맛과 멋

2019-01-21 00:00
서울역에서 출발해 만리동 광장 손기정 선수 발도장 보고
첫 고딕식 건물 약현성당·옛노습 간직한 성요셉아파트 지나
학림부대찌개·홍합밥 먹고 유기농 커피에 신선한 초밥까지
중림동 역사·문화 엿볼 수 있는 '서울로7017 테이스팅 투어'

“먹는 즐거움은 하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행위로부터 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이다.” 미식가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이 한 말이다.

먹는 즐거움은 이제 여행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먹방, 맛집, 여행이 결합된 예능 방송 프로그램의 인기가 지속되면서 맛있기로 소문난 음식을 맛보기 위해 떠나는 ‘푸디 트래블(Foodie Travel, 미식가 여행)’ 트렌드는 2019년에도 지속될 전망이다. 

◆한국의 음식, 지역의 문화를 아는 시간···서울 가스트로투어

사실 '미식투어'는 미국의 시카고, 뉴욕과 스페인, 유럽이나 호주 등에서는 일반화된 여행 테마였지만 한 상 차림을 중시해온 우리나라에서는 조금은 낯선 행위였다. 이 낯선 여행을 '서울 가스트로 투어'가 좀더 친근하게 만들었다. 

한국 음식의 맛, 그리고 열정과 에너지가 가득한 서울의 멋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음식 인문학 여행 '서울 가스트로 투어'는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치며 생소한 여행 영역을 개척해온 강태안 서울 가스트로 투어 대표의 작품이다.

서울 가스트로 투어에서 진행하는 여행은 프로그램은 총 여덟 가지다. '서울로 7017 테이스팅 서울 투어'를 비롯해 △홍대 나이트 투어△수원 미식 투어△사라져가는 자염, 바다음식 여행△전통주 명인과의 만남 등 흥미로운 미식투어 프로그램이 가득하다. 

이중 '서울로 7017 테이스팅 서울 투어' 프로그램은 2017년 서울시 관광 스타트업 공개 오디션을 통해 우수상을 받았다. 중림동 곳곳에 숨은 맛집, 골목의 이야기를 듣는 이 여행 코스는 강태안 대표가 가장 애정을 갖는 곳이기도 하다.

강태안 대표와 함께 서울로 7017 테이스팅 서울 투어에 나섰다. 함께한 시간은 불과 3~4시간 남짓이었지만 한국의 음식문화뿐 아니라 서울 중림동에 깃든 역사·문화까지 배울 수 있었던 그 시간이 선사한 감동은 큰 울림이 되어 가슴 속에 남았다. 

◆중림동 골목에 배어든 이야기···서울로 7017 테이스팅 서울 투어의 시작 
 

서울로 7017에서 바라본 서울역과 역 주변 전경[사진=기수정 기자]


중림동 코스는 문화역서울284(서울역 2번 출구 앞)에서 출발한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문화역서울284의 전시를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본래 코스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서울로 7017에 올라 서울의 전경을 담는 것으로 본격 시작한다. 명소가 된 서울로 7017을 지나 중림동 쪽으로 내려가면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설의 배경지가 바로 이곳 중림동과 만리동 일대다. 

1970년대 재개발 열풍 속에서 짓이겨진 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이 책 속의 판잣집과 공동 화장실, 가내수공 봉제공장이 밀집했던 만리동 골목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발바닥을 새긴 동판을 만리동 광장에서 만날 수 있다.[사진=기수정 기자]

서울로 7017에서 내려서서 만리동 쪽으로 가다 잠시 멈춘 만리동 광장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발바닥을 새긴 동판이 있다. 

손 선수가 만리동의 양정학교(현재 손기정 체육공원 자리)를 등·하교할 때 걸었다는 이 길 주변에는 대왕참나무도 식재돼 있다. 손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상대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던 화분 속 묘목이 바로 대왕참나무였다고. 

유년 시절 손기정 선수와 한 아파트 주민으로 살았다는 강태안 대표의 여담을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약현성당에 다다랐다. 
 

중림동에 위치해 중림동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다.[사진=기수정 기자]

중림동 도보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약현성당은 ​서울대교구의 두 번째 본당으로, 지난 1892년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건물이자 한국 최초의 고딕식 건물이다.

수많은 순교자가 죽임을 당한 서소문 형장의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그들의 넋을 기리고 정신을 본받기 위해 건립됐다는 약현성당에 서서 숭고한 넋을 잠시 기린다. 

성당 아래쪽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인 성요셉아파트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약현성당 신자를 위해 지어졌다는 이 아파트에는 지금도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거주하고 있단다. 
 

독특한 내부구조를 지닌 성요셉아파트. 지어진 지 50여년이 됐다.[사진=기수정 기자]


건립 당시 최신식 아파트로 명성을 떨쳤던 성요셉아파트였건만 지금은 낙후건물의 대명사가 됐다. 설립 당시의 주거환경이 고스란히 보존된 이곳 아파트 1층 상가에는 좁고 허름한 방앗간들이 고소한 냄새를 풍긴다.

세월의 더께를 품은 성요셉아파트는 내부 구조 등 건축 형태의 독특함을 인정받아 서울시가 미래유산 아파트로 지정했다. 

◆중림동 골목에 스며든 '맛' 이야기···서울로 7017 테이스팅 서울 투어의 감동

이제 본격적으로 맛집 나들이에 나설 차례다. 
 

부대찌개의 따끈한 국물 한 숟가락에 겨울철 꽁꽁 언 몸이 사르르 녹는다.[사진=기수정 기자]


중림동 투어에서 찾은 첫 번째 맛집은 '학림부대찌개'다. 의정부식 부대찌개집이다. 

건축업에 종사하던 주인장은 중림동의 입시학원이 신축건물을 짓자 인근에 건물 한 채를 매입하고 하숙집을 차렸고 건물 1층에 부대찌개 식당을 개업했다.  

사업을 하면서 평소에 자주 드나들던 식당의 부대찌개가 어찌나 맛있던지 500만원을 내고 보름간 출근해 비법을 배웠고 아주머니에게 그 비법을 전수했단다. 

학림부대찌개의 맛의 비밀은 ‘좋은 재료’에 있다. 단가가 다소 높아질 지라도 식자재는 늘 '고급'이다. 

사실 단골로 드나들던 대기업 계열 식품회사 직원이 "우리 회사 제품으로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에 두말하지 않고 바꿨다고. 

재료가 좋으니 부대찌개의 맛이 안 좋을래야 안 좋을 수 없는 일. 국물은 칼칼하지만 탁하지 않고 부대찌개용 김치를 따로 담그는 덕에 오래 끓여도 김치가 무르지 않는다.

두 번째 맛집은 홍합밥 전문점 '미름'이다. 오래된 서울 골목의 형태가 남아있는 호박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홍합밥과 된장국. 고소한 홍합밥에 칼칼한 된장국 한 입에 입안이 행복해진다. [사진=기수정 기자]

본래 상호는 '미르'였다. '국정농단 주역' 최순실이 주도한 재단의 이름이 '미르'여서 '미름'으로 바꾸게 됐다는 웃지 못할 사연이 담겼다. 

작은 공간이지만 음식 맛은 훌륭하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눈 먼 심봉사가 홍합밥을 먹었다면 눈을 번쩍 뜨지 않았을까 하는 맛이랄까.

생홍합을 곱게 다져 밥과 함께 짓는데, 그 맛이 고소해 한 그릇 뚝딱이다. 갓 지은 홍합밥과 된장국의 조화가 일품이다. 그날 동행한 일행 중 지독한 감기에 걸린 탓에 입맛을 잃은 이가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홍합밥만큼은 "맛있다"고 극찬을 했다. 

세 번째로 찾아 나선 맛집은 카페였다. 
 

커피숍 토브의 드립 커피. 손님이 뜸한 4~5시경 가면 주인장이 직접 내려주는 드립커피를 맛볼 수 있다. [사진=기수정 기자]

커피의 향과 맛에 반해 잘 다니던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커피숍 '토브'를 열었다.

앉을 곳도 없는 작은 공간이지만 이곳의 커피는 보존제 등이 첨가되지 않은 '유기농 커피콩'으로 만든다. 주인장의 운영 철학이다.

그만큼 재료비는 비싸지만 손님에게 판매하는 가격은 2000원에 불과했다. 주인장이 전문적인 솜씨로 내려주는 드립 커피도 3000원이다. 내로라하는 커피숍보다도 맛은 훌륭하다.
 

현대수산에서 선보이는 가스트로투어 맞춤형 메뉴는 초밥과 생선구이다.[사진=기수정 기자]


한국경제신문사 앞에 있는 '현대수산'에서 선어로 만든 초밥과 생선구이를 맛보면 미식투어는 마무리된다.

초저녁부터 발 디딜 틈이 없어 예약 없이는 갈 수 없는 이곳의 회는 신선함은 기본이다. 다른 횟집에 비해 횟감을 두툼하게 썰어내는 덕에 씹는 맛이 있다.

음식을 맛과 음식에 배어든 주인장의 진심, 강태안 서울 가스트로투어 대표의 열정이 어우러진 이번 여행, 진정성 넘치는 이 시간은 추운 날씨에 꽁꽁 언 몸과 마음을 사르르 녹이기에 충분했다.
 

강태안 서울가스트로투어 대표[사진=기수정 기자]

학림부대찌개의 부대찌개. 국물맛이 깔끔하다.[사진=기수정 기자]

오래된 서울, 그리고 현대의 서울이 공존하는 중림동[사진=기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