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⑳] 등장인물 : 잊혀진 이중간첩 한길수·중립화통일론 외친 김용중

2018-04-22 17:40

[한국이 독립을 위해 미국과 일본에서 이중첩보원으로 활약한 한길수를 그린 영화 '한길수 (HAAN)'. 사진=영화 캡처]

[한길수]

(韓吉洙, 1900~1976)
태평양전쟁 당시 미주교포 지킨 영웅, 이승만 견제로 쓸쓸히 여생 마쳐

경기 장단에서 출생, 1905년 다섯 살 나이로 부모 품에 안겨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유년시절부터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이승만이 운영한 한인중앙학원에서 공부했다. 구세군에서 일했으며, 1930년대 초반까지 보험외판원, 부동산중개업 등에 종사했다.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이 한인공동회(1932.10.25)를 개최하고 대한인홍보부를 설립하자, 구미부 서기로 임명돼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정두옥 대한인홍보부장과 공동명의로 작성해 제출한 <하와이 일본인 여론조사> 보고서로 미 육군 정보당국 및 연방조사국(FBI)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한인혁명당을 조직해 리한(Lyhan)이라는 코드명을 쓰며 비밀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 
1936년 하와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잠시 근무하며 첩보활동을 수행했고(이 때문에 일본 첩자라는 오해를 받았다), 하와이 주 승격을 위한 미국 상하양원 합동조사위원회 공청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일본의 음모를 폭로, 미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활동으로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 언론의 영웅이 되어 재미 일본인들을 수용소에 격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당시 일본인으로 분류된 재미 한인들의 재산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자 국방공작봉사원에 임명돼 대미외교활동에 나섰으나, 이승만의 견제를 받아 1년만에 물러났다. 해방 뒤 캘리포니아의 농장에서 복숭아 따는 일을 하며 어려운 삶을 살다가 눈을 감았다. 2005년, 그의 일생을 재조명한 영화 이 개봉되었다. 한국민족대백과 참조
 

[1942년4월 5일,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총회 앞에 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용중.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김용중]

(金龍中, 1898~1975)
영자지<한국의 소리> 발행, 미국정부에 한국독립 호소

충남 금산 출신으로, 상해를 거쳐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노동을 하며 고등학교를 마친 뒤 하버드, 콜롬비아대학 등에서 수학했고, 1928년 로스앤젤리스에서 고향 선배와 함께 청과물 도매상을 차려 사업에 뛰어들었다.
1939년 1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어, 미주한인사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위원 겸 선전과장 자격으로 워싱턴에 가서 대미 선전활동에 진력,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라는 영자지를 발행해, 미국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한국 독립을 호소했다. 한길수와 함께 미국 국무부에 상당한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해방 뒤에는 단정에 반대하며 중립화통일론을 주장했다.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