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⑮] 25세 조선청년의 수통폭탄, 세계를 진동시키다

2018-08-23 10:06
침략의 원흉 응징한 상해의거

[천장절 축하연 식사를 낭독하는 무라이 총영사와 연단에 도열한 수뇌들]

1932년 4월 29일 역사의 현장 홍구공원. ‘천장절 및 상해사변 전승 기념’ 행사는 상상 이상이었다. 일제는 하늘에 비행기 수십 대를 띄워 군사력을 과시하며, 이른 아침부터 기갑 및 보병 기마부대가 상해 사천로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한편, 행사장 주변 경비도 삼엄했다. 기념식 단상 5m 지점엔 기마병이 제1경계선을 치고, 18m 지점에는 보병이 제2경계선을 쳐 기념식 단상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당시 ‘시사신보’ 4월 30일자 기사에 ‘일본의 공·상업 인사와 상해 거주 일본인 남녀노소, 그리고 무력시위에 나선 일본군 1만명까지 총 3만명의 일본인이 자리를 메웠다’고 보도했다.


기념식장에 들어서다
단상(壇上)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 일찌감치 온 매헌. 기념식장에 들어서는 매헌의 행색은 영락없는 일본인이었다. 당시 일본인 사이에 유행하던 스프링코트를 입었고, 일본식 물통을 어깨에 메고, 손에는 일본 보자기에 싼 도시락과 일장기까지 들고 있었다.
초대장(입장권)이 없는 매헌은 홍구공원 정문을 지키는 중국인 경비 앞으로 당당하게 다가가서, 유창한 일본말로 일본인 행세를 하자 무사히 통과했다. 그는 단상 19m 지점, 일반관람객 속에 자리를 잡았다. 사전 답사 때 점찍어 놓은 장소였다.
오전 9시가 되자 상해 파견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필두로 내․외빈이 입장했다. 첫 행사는 상해사변 승전을 기념하는 관병식(觀兵式)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사불란(一絲不亂)한 군인들의 군사퍼레이드에 일본 관중들은 일장기를 흔들며 열광했다. 이때 매헌의 머릿속은 온통 ‘언제 폭탄을 투척, 시라카와 대장과 그 일당들을 폭살할 것인가’로 꽉 차 있었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관병식이 끝나자 약 10분간 휴식한 후, 일본천황 탄신일을 경축하는 천장절 관민합동 축하식이 시작되었다. 일본 문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략)…관병식은 오전 11시 20분경 끝났으므로 예정대로 축하식으로 옮아 식장 중앙 앞에 설치한 봉축대상(奉祝臺上)에는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를 비롯하여 상해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쓰(村井倉松), 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 및 거류민단 서기장 토모노 모리(友野)가 착석하고…”
 

[윤의사가 던진 수통 폭탄이 터지는 순간 장면.jpg]

역사적 순간, 천지를 뒤흔든 굉음
잔뜩 찌푸렸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늘도 이 모든 것을 예견한 듯 매헌을 도왔다. 11시 40분경 개회사 및 축사에 이어 일본 국가 ‘기미가요’ 마지막 구절이 합창되고 있을 때, 스피커에서 ‘삐익, 삐익’ 잡음이 났다. 경계병들의 시선은 무대로 쏠리며 어수선했다.
‘기회는 이때다!’ 매헌은 도시락 폭탄을 슬며시 발밑에 내려놓고, 제2경계선을 과감히 돌파했다. 순식간에 제1경계선 가까이로 달려간 그는 물통형 폭탄의 안전핀을 뽑은 후, 있는 힘을 다해 단상을 향해 투척했다. 매헌의 손을 떠난 폭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히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이 있는 단상 정중앙으로 떨어졌다.
천지를 진동하듯,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단상은 일순간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폭탄이 얼마나 강했던지 단상은 뻥 뚫리고,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해 7명 모두가 피투성이가 된 채 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의거 직후 부축을 받으며 연단에서 내려오는 무라이 총영사 등 수뇌들 (도쿄니찌니찌신문, 1932년 5월 1일자 호외).]

 
상해의거의 영웅, 현장에서 체포되다
매헌은 애초에 폭탄 두 개를 모두 던지려고 작정했다. 그런데 식장 상황을 보니 도저히 두 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다. 이에 매헌은 끈이 달려 있어서 던지기 쉬운 물통형 폭탄을 던진 후, 곧바로 도시락 폭탄을 가지러 가려고 돌아섰다. 바로 그때 옆에 있던 우에마쓰(植松)소장의 호위병 고우모토(後本武彦) 일등병조(一等兵曹)는 매헌을 잡아 땅으로 내동댕이쳤다. 이에 매헌은 얼굴 오른쪽이 땅에 부딪쳐 순간적으로 잠시 혼도(昏倒:정신이 심히 어지러운 상태)했다. 이때 주위에 있던 일본인들도 가세해 매헌을 무차별하게 구타했다.
체포된 후 거사 성공을 확인한 매헌. 그는 감격에 겨워 연행되는 과정에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며 자신의 이름 ‘윤봉길’을 외쳤다. 바로 그 순간 매헌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영웅’으로, ‘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로 우뚝 섰다.

[폭탄이 터진후 우왕좌왕 혼란스러운 군중]

 

[중상을 입고 업혀서 병원으로 이송되는 무라이 총영사. ]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홍구공원 앞에 있는 헌병 제1분대로 연행됐다.
연행 과정에서 매헌이 외친 이름을 ‘윤봉천(尹奉天)’이라 잘못 알아들은 중국 신문사 기자들은 기사에도 ‘윤봉천’이라 표기했다. 중국 각 신문사들이 보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폭탄을 투척한 금년 25세의 한인 윤봉천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심문 시 윤은 태연하게 자신이 폭탄을 투척하였음을 시인하였다고 한다(時事新報,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금년 25세다. 현장에서 체포된 뒤에도 윤봉길은 전혀 긴장하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태연자약하였다. 윤봉길은 현재 일본 헌병사령부에 감금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고 있다(大晩報, 1932년 4월 30일)”
 

[수통 폭탄의 위력으로 구멍이 난 연단 자리.]

수사를 교란시키다
상해 파견군 헌병 제1분대로 연행된 윤봉길은 ‘자신은 충청남도 예산에서 왔으며 한국독립당원이다’며 거사목적에 대해서도 당당히 밝히고, 나머지는 허위진술로 교란작전을 펼쳤다. 이때 윤봉길은 김구와 도모한 모든 것을 ‘김구’란 이름 대신 ‘이춘산’으로 둘러댔다. 왜 거사 동반자를 이춘산이라고 진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의거 전일 이유필과 세운 진술계획에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즉, 이춘산은 상해교민단 정무위원장 춘산 이유필의 이름을 가공한 것이다. 그 용모에 대해서도 이유필의 모습과는 전혀 엉뚱하게 묘사했다. 거사 자금 2백원도 이춘산으로부터 받았으며, 모든 계획과 준비도 그와 함께했다고 진술해 수사를 교란시켰다.
윤봉길 의사가 진술한 ‘이춘산’이 프랑스 조계에 거주하는 교민단장(정무위원장) 이유필임을 알게 되자, 일본영사관은 프랑스공무국에 이유필의 체포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프랑스공무국은 그동안 한국인 독립운동가에 우호적이었으나, 이번 사건이 워낙 크고 민감해 일본영사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프랑스공무국 경찰은 29일 오후 2시, 이유필의 집을 습격했으나 그는 이미 피신한 뒤였다. 이에 경찰은 집안에 잠복해 있다가 그 집을 방문한 안창호를 체포했다. 안창호는 이날 이유필의 아들 만영(晩榮)을 만나 소년단 기금을 주기로 약속했었기 때문에 찾아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다음날 꼭두새벽 윤봉길 의사는 강만로(江灣路)에 있는 상해 파견군 헌병대 본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헌병제1분대에서 심문을 담당했던 헌병대위 오오이시 마사유키(大石正幸)는 사건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 또다시 윤봉길 의사가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하며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고 했다. 윤봉길 의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거사 동반자가 이춘산이라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심한 매질과 고문에도 윤봉길 의사가 동요치 않자, 오오이시도 손을 들고 말았다. 윤봉길 의사의 교란 진술은 완전히 성공했다. 이에 거사 동반자는 이유필로 확정되어 수사는 종결됐고, 사건 3일 만인 5월 2일 윤봉길 의사는 군법회의(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이춘산’이란 이름과 관련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의거 이틀 전인 27일, 매헌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숙소를 여관 동방공우 30호로 옮겼다. 이때 숙박부에 나이 25세, 이름은 윤봉길로 기재했다. 그런데 의거 하루 전 28일 이유필을 만나고 온 후, 자신의 이름을 ‘이남산(李南山)’으로 바꾸어 기재했다. ‘이춘산’과 ‘이남산’ 이름만으로는 형제인 듯, 그 의미가 심상치 않다.
2009년 8월 11일 이유필 선생의 셋째 아들 이준영(李晙榮) 목사는 “윤 의사는 우리 집 단골손님으로, 특히 냉면을 좋아해 자주 만들어 주었다”는 얘기를 어머니(이유필 선생의 부인)로부터 자주 들었다고 필자에게 밝혔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의거 전일 28일 만난 매헌과 이유필 두 사람은 ‘임정을 보호하기 위해 매헌이 체포될 경우의 진술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윤봉길 의사의 상해거사가 있던 바로 그날, 정화암 선생이 이끄는 ‘남화한인연맹’ 소속 백정기 의사도 이 행사의 거사를 계획했다. 그런데 입장권을 구해 주기로 약속한 중국인 왕야치아오(王亞樵)가 29일 아침 10시까지도 나타나지 않아, 거사계획은 수포로 끝났다.
이는 한인애국단과 전혀 무관했고, 양 단체는 서로 거사계획을 전혀 모르게 추진되었다.


■ 상해시절 매헌 거주지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해 霞飛路和合坊에 있는 安明鎭의 집에서 1주일간 거주 후, 西愛威斯路로 이주하여 1개월쯤 거주.

1931년 6월 중순
鄭安立과 함께 陶爾斐司路에 모자공장(美李公司)을 개업하고 이곳 공장에서 기거.

1931년 7월 중순
경영난으로 미리공사를 7월 중순 “중국종품공사(소재지:望志路 北永吉里 18號)“에 양도 하고 직공으로 취업, 이곳 공장에서 기거.

1931년 9월초
중국종품공사가 자금난으로 휴업하여 上海 法界 蒲石路 622號로 이주해 거주.

1931년 10월초
불조계 霞飛路和合坊 東浦石路 91號 3層 안공근의 집에서 거주

1931년 11월초
안공근 집의 이사(移徙)로 거처를 上海 法界 霞飛路 1014弄內 第27号로 옮김.

1932년 3월 하순
불조계 馬浪路 普慶里 23號 전차검표원 桂春建의 집에서 거주.

1932년 4월 27일 ~ 28일
佛租界 貝勒路에 있는 여관 東方公寓 30호에 숙박.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