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⑲]한줌 뼈로 돌아온 해방 조국, 거리는 눈물의 만장행렬
2018-09-02 18:55
광복된 조국에서 영원히 잠들다
1946년 초 김구 선생은 동경에 있는 신조선건설동맹 위원장이었던 박열(朴烈)선생에게 윤봉길 의사의 유해 봉환을 부탁했다. 이에 박열, 서상한(徐相漢), 이강훈(李康勳)의 주도하에 ‘대한순국열사 유골봉환회’를 조직한 후, 일본에서 순국한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 봉환도 함께 추진키로 했다. 이들은 재일교포 청년들의 힘을 빌려 유해 발굴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일본 정부의 비협조로 유해 발굴이 쉽지 않았으나 일단 이봉창, 백정기 의사 유해는 발굴되었다. 그러나 가나자와에서 순국한 것만 알 뿐, 극비리에 암매장(暗埋葬)된 윤봉길 의사의 유해발굴은 난관에 봉착했다. 많은 기관을 찾아 매장 장소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으나, 조그마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유해 발굴에 나서다
일단 서상한 선생을 필두로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현지로 가기로 결정했다. 1946년 3월 2일 가나자와에 도착한 서 선생은 조선인연맹 이시카와현 본부를 방문해 협조를 구했다. 다음날 연맹 사무실에 발굴단 본부를 설치, 서 선생이 단장을 맡아 발굴단을 구성했다.
1946년 3월 4일 발굴 첫날, 발굴단은 가나자와시 노다산(野田山)에 있는 육군묘지와 시영 공동묘지를 재일교포 40여 명이 수색했다. 그런데 러일전쟁 때 포로가 되었다가 죽은 러시아병사들의 묘표만 있을 뿐 윤 의사의 묘표는 흔적도 없었다.
바로 그때 서 단장은 묘지관리사무소 관리인 기무라(木村淸吉) 스님 부부를 다그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입수했다. 기무라 부인은 “관리사무소 인근에 매장된 것 같다. 구전(口傳)을 듣고 그분을 존경하게 되어 가끔 관리사무소 내에 향을 피웠다”고 알려 주었다. 막연하나마 암매장 범위가 좁아졌다.
3월 5일 발굴 둘째날, 관리사무소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했다. 잡나무와 대상구역이 예상보다 넓어 암장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발굴대원이 한 노인을 데리고 왔다. 매장 작업 때 참여한 소네(曾根) 헌병의 형이었다. 노인은 벌벌 떨면서 “동생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며 한 곳을 지목해 파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인근의 일본인들도 비협조적이며 기피했다. 유해 발굴이 점차 막막해지자 발굴대원들도 실의에 빠졌다. 이날 오후 서 단장은 최후 수단으로 레일을 깔고 밀차를 이용해 이곳 묘지 전체를 파헤치겠다고 공표했다. 이에 놀랐는지 일본군 간수였던 시게하라(重原)가 한밤중에 서 단장의 숙소로 몰래 찾아와서 암매장 장소를 알려 주었다.
그 장소는 놀랍게도 관리사무소와 바로 옆에 있는 쓰레기하치장 사이의 좁은 통로였다. 그 누구도 ‘쓰레기하치장 옆 통로에 시체를 매장, 짓밟고 다닐 것이다’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곳이다.
3월 6일 발굴 셋째날, 반신반의하며 시게하라가 알려준 장소에 소금과 술을 뿌리고 파기 시작했다. 6척가량 파내려가자 썩은 관이 나왔고, 관 위에는 십자가모양의 목제형틀이 놓여 있었으며 관 속에는 양복, 중절모자, 구두, 머리카락 등이 있었다. 드디어 찾은 것이었다.
발굴대원들은 윤봉길 의사의 유골 앞에 잠시 묵념을 올렸다. 당시 가나자와 의과대학 2학년 주정균 학생이 윤 의사 유골 201개를 정중히 수거했다. ‘순국열사 윤봉길지관’이라고 쓴 새로 만든 관에 옮겨진 윤 의사의 유골과 유품은 조선인연맹 이시카와현 본부에 안치되었다. 이후 3월 8일 동경으로 향해, 먼저 발굴된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재일본한인건국청년동맹(소재지, 도쿄 스기나미구 오기구보)’ 봉안소에 봉안됐다.
유품 일부가 분실되다
유해가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일본으로부터 오자, 유해 봉환 및 장례 절차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1946년 4월 초순 김구 선생의 제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유해 봉환을 주도하기로 결정했다. 1946년 4월 18일 ‘신조선건설동맹’ 이강훈, 김정주, 김기성, 유호일은 발굴 유품 중 1차로 자색 양복과 검정구두 그리고 중절모자를 품에 안고 일본 학가다(博多)항을 떠나 4월 25일 부산에 도착한 다음 서울로 봉환하여 김구의 거처인 죽첨장(경교장)에 안치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유품은 분실되어 현재 남아 있지 않다. 1946년 4월 2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윤봉길 열사 거의(擧義) 기념대회’ 때 식장에 진열했다가 분실하고 만 것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부끄러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참으로 애석하기 그지없다.
유해, 마침내 조국 땅으로 돌아오다
1946년 5월 15일 마침내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유해와 윤 의사의 형틀이 맥아더 사령부 군함편에 부산으로 봉환되었다. 이날 유해 봉환의 책임자는 ‘대한순국열사 유골봉안회’ 대표 서상한 선생이었다. 삼의사의 유해는 부산 용두산 밑에 위치한 부산 제7국민학교(동광국민학교)에 임시로 마련된 유골봉안소에 안치되었다.
이때 언론은 삼의사의 유해 봉환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언론은 세 명의 애국지사를 ‘삼의사’(三義士)라고 명명(命名) 보도함으로써 ‘삼의사’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이에 오늘날도 삼의사란 명칭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시민 추도식이 거행되다
그해 6월 14일 추도식에 참석하러 윤남의를 비롯한 유족들과 김구, 선우진, 정인보, 방응모, 안낙생, 안우생 등 30여 명이 특별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들은 먼저 유골봉안소가 차려진 동광국민학교를 찾았다. 이때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사의 영전(靈前)에서 목 놓아 울었다. 16년 만에 그토록 그리던 형을 만난 동생 남의도 격한 감정에 그동안 참아왔던 울음보가 터졌다. “형님! 왜 이제 오신 겁니까…어머니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다음날인 6월 15일 아침, 궂은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는 11시가 조금 지나 3대의 영구차에 안치되어 시내 각 중고생 대표와 진해 해병대 대표들이 인구(引柩), 조기(弔旗)와 악대를 선두로 추도식장으로 출발했다. 영구차가 지나는 연도에 늘어선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비가 내리는데도 떠날 줄을 몰랐다.
정오 12시 15분 삼의사의 유해가 부산 공설운동장 식장에 도착했다. 윤 의사 사형이 집행된 피에 묻은 십자가모양의 형틀이 식장에 들어설 땐, 5천여 명의 시민들은 ‘아…’ 탄식과 충격 속에 일순간 얼어붙은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추도식은 최석봉 선생의 사회로 엄숙하게 진행됐다. 국민의례에 이은 추도 주악(奏樂), 김철수(金喆壽) 선생의 개회사에 이어 이강훈 선생의 삼의사의 약력 보고가 있었다. 이후 각 단체 대표들의 추도문 낭독, 분향에 이어 김구 선생의 훈화, 윤 의사의 동생 윤남의의 답사 순으로 숙연(肅然)하게 진행됐다. 식은 1시가 넘어 ‘대한 자주독립 만세’ ‘김구 주석 만세’를 외치며 폐회되었다.
추도식 다음 날, 윤봉길 의사 유해는 동생 윤남의, 이봉창 의사 유해는 한독당 경남지부장 최석봉, 백정기 의사 유해는 육삼정 의거 동지 이강훈 품에 안겨 임시 특별열차 ‘해방자호’ 편으로 서울로 향했다. 열차 기착지(寄着地)마다 삼의사의 혼백(魂魄)을 위무(慰撫)하며 추앙(推仰)하는 인파들로 넘쳐났다.
오후 5시 40분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김규식 선생 등 애국지사와 수많은 국민들이 삼의사의 유해를 정중히 맞아, 태고사(현 조계사)에 안치하고 빈소가 차려졌다. 빈소에는 이승만 선생 등 지도급 인사들과 시민들의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그날의 현장 모습은 <조선일보> 6월 18일자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그날의 현장 모습은 <조선일보> 6월 18일자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尹南儀 談, 차창에 뿌리는 빗줄기를 내다보며 잠시 묵상에 빠져 있던 윤 의사의 영제(令弟) 윤남의는 목 메인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감격의 결의를 말하였다.
우리는 물론 36년 동안 싸운 결과, 기쁨의 이날을 맞이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부산에서 추도식을 베풀어 주시고, 동시에 성대히 모시게 됨은 참으로 우리 유족으로서는 넘치는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첫째 형님 유골 앞에 뵈올 적에, 나는 전쟁에 가서 승전하고 돌아오는 형을 맞이하는 것같이 기쁜 감격으로 오로지 눈물뿐이었습니다. 저는 형님 유골 앞에 맹세하였습니다. 형님은 형님의 할 일을 다 했다 생각하지만, 아직 조선의 할 일은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미력한 힘이나마 나의 힘을 다하여 우리 자주독립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맹세합니다.”
마침내 윤봉길 의사는 생전에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그 땅에 영원한 안식처를 얻었다.
삼의사(三義士;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국민장은 1946년 6월 30일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폭우로 연기되어 7월 6일 치러졌고, 구국의 영웅 세 사람의 유해는 효창공원에 나란히 모셔졌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중 가장 격이 높은 ‘대한민국장’을 내려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구국을 위한 의기의 화신, 25세 청년 의사 윤봉길. 25세의 짧은 생이었지만, 순정한 영혼의 불꽃 같은 그의 삶은 짧고 굵었다. 그는 후대(後代) 청년들의 사표(師表)로 귀감(龜鑑)으로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