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⑥]등장인물 : 조국광복 위해 헌신한 요인, 박은식·신채호·엄항섭·무정

2018-04-02 10:05

[백암 박은식 선생.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
대한매일신보 주필·제2대 임시정부 대통령

황해도 황주에서 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에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황해도의 두 신동이라 불렸다. 갑오농민전쟁을 ‘동비(東匪)’들의 반란이라고 비난했으나, 고루한 주자학과 위정척사운동에 회의를 품고 독립협회에 가담했다.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했으며, 영국인 베델이 설립한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 <한국통사(韓國痛史)>,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썼으며, 청나라 말기의 개혁가 캉유웨이(康有爲)로부터 “법필(法筆)이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의 정수를 득하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무장투쟁을 지지했고,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1925년 제2대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단재 신채호.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애국계몽운동 주도·신민회 창립위원
나이 스물이 되기도 전에 독립협회에 가담해 일찌감치 애국계몽운동에 나섰다. 1095년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로 활약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저술활동에 힘썼다. 신민회(新民會) 결성취지문,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했으며, 이광수나 최남선과 달리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한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표적 문사(文士)다. 무장투쟁을 지지했고, ‘창조파’의 이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박은식과 함께, 사대주의를 거부하고 민족사관의 기틀을 세운 사학자로서, <조선사통론>, <조선상고사> 등의 역작을 펴내, 우리 민족의 뿌리를 밝혔다. 1929년 왜경에 체포, 1936년 뤼순감옥 독방에서 순국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일파 엄항섭.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일파(一波) 엄항섭(嚴恒燮, 1898~1962)
백범 김구 최측근… 한국독립당 활약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법무부 참사로 임명돼 활동했으며, 중국 항저우(杭州) 지장대학(芝江大學)을 졸업했다. 임시정부가 가장 힘들던 1920년대 중반, 프랑스조계 공무국에 취직해 받은 월급으로 임정 요인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1930년, 백범, 이동녕, 안창호 등이 창당한 한국독립당에 가담했다. 수당의 남편 성엄 김의한과는 둘도 없는 동지 사이였으며, 평생 김구의 최측근으로 그를 곁에서 모셨다. 해방 후, 백범을 수행해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북한에서 숨을 거두었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인 연미당(延微堂, 1908~1981) 또한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연미당은 수당과 망명 시절 내내 친자매처럼 지냈다고 한다.

 

[무정 장군.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무정(金武亭, 1905~1951)
중국 공산단 대장정 참여… 항일운동가
서울 중앙고보를 1923년 중퇴하고 상해로 망명해, 바오딩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를 졸업했다.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7년 루이진(瑞金) 소비에트에서 홍군(紅軍)에 입대, 유명한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에 참여했다. 1937년 중국공산당 팔로군(八路軍) 초대 포병단장에 임명돼 항일전을 치렀다. 해방 후 북한에서 군사요직을 역임했으며, 한국전쟁 때는 제2군단장으로 참전했으나, 숙청되어 중국에서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