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열의 디지털 콘서트] 잊힐 권리와 디지털 장의사
2017-11-28 06:00
전통 장례 절차 중에 고인 유품을 소각하는 순서가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완전한 이별이다. 저승의 삶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이승과 완전한 결별이 있어야 한다. 망자의 모든 유품은 망자와 함께 이승을 떠나야 한다. 옷이나 애장품과 같은 물건뿐만 아니라 심리적 유품 또한 정리돼야 한다. 한이나 미련 등이 남아 있으면 차마 저승 문턱에 들어서지 못한다. 중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어 산 사람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고인을 잘 보내드려야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이 무탈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의 죽음 이후 일련의 과정을 하나의 장례 문화로 정교하게 만들고 제도화시킨 이유다.
죽음이 가까운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는 죽음 이후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 이전의 삶이다. 죽음 이후의 삶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다른 차원의 삶이라 영적 두려움이 지배적이다. 반면 죽음 이전의 삶은 복잡하게 다가온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후회와 아쉬움으로 점철돼 있다. 이제 더 이상 회복할 시간이 없다. 모든 것을 다 가슴에 묻고 가야 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나와 함께 떠나야 한다. 하나 둘 정리하면서 이승의 삶에 안녕을 고한다. 좋은 추억 외에 더 이상 내 흔적이 이승에 남아 있으면 안 된다. 내 모든 유품은 소각되어야 하고 내 과거는 잊혀야 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도 소각되지 못하는 유품들이 남아 있게 되면서 고인과 가족 모두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물질적 유품들은 소각할 수 있지만 디지털 코드로 만들어져 정보 네트워크 위에서 유통되고 있는 모든 데이터는 영속적으로 존재한다. 잊고 싶고 잊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데이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삭제하는 기술과 방법 또한 쉽지가 않다. 새로 등장한 잊힐 권리가 하나의 기본적 인권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2010년 스페인의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하 곤살레스가 구글에 자신의 빚 문제와 재산 강제매각 내용이 나온 기사를 삭제할 것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잊힐 권리 논쟁이 여러 나라에서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잊힐 권리가 법제화된다고 해서 개인의 디지털 사생활이 완전히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생성된 데이터를 삭제하기 위해서는 사생활 침해나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된다. 법률에 의하면 개인의 권리가 침해된 경우 해당 정보를 취급한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침해사실을 소명하여 그 정보의 삭제 또는 반박 내용의 게재를 요청할 수 있다고 하지만, 특정 정보는 이미 네트워크를 통해 여러 곳으로 전달됐을 가능성이 크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한 번 만들어진 데이터는 쉽게 소멸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이 살아 있을 때는 반박 가능성이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죽음 이후다.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이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의사가 고인의 이승에서의 삶을 잘 정리해서 편안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길을 담당하듯 디지털 장의사 역시 고인의 디지털 유품을 잘 정리하는 일을 전담한다. 디지털 장의사는 의뢰받은 고객의 요청에 따라 고객이 남긴 데이터를 삭제한다. 직접 삭제가 힘든 경우 데이터가 남아 있는 사이트에 삭제를 요청한다. 최종적으로 고인이 디지털 유품에 의해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디지털 장의사는 한국 고용정보원이 향후 5년 내 유망 직종으로 선정할 정도로 미래 지향적 직업이다. 디지털 장의사를 국가 공인 자격증으로 인정하자는 논의도 있을 정도로 그 중요성을 점차 인정받고 있다.
이제 점점 더 디지털 유품을 둘러싼 논의는 특정 개인의 문제를 떠나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장례 문화는 고인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원한 유대를 위한 사회 문화적 제도다. 고인들을 편히 보내야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편안하다.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이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