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주식잡기]차돌과 곱돌과 짱돌
2017-06-14 20:00
차돌과 곱돌과 짱돌
신세대와 쉰 세대 분류법이 한때 유행했다. ‘에덴의 동쪽’ 주인공이 제임스 딘이라고 하면 쉰 세대, 송승헌이라고 하면 신세대이다. 연예인 임수정에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로 시작하는 노래 ‘연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쉰 세대,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여주인공이자 영화 ‘장화 홍련’에서 국민 여동생 문근영의 언니 역을 떠올리면 신세대이다.
석기시대를 ‘타제석기’와 ‘마제석기’로 나누면 쉰 세대이다. 신세대는 ‘뗀 돌’과 ‘간 돌’이라고 한다. 지석묘와 입석도 고인돌과 선돌이다. 주판알을 튕기느냐, 계산기를 두드리느냐 역시 세대 간 표현의 차이이다. 이런 식의 분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극적인 분류 키워드는 ‘토끼와 거북’일 것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만큼 내용이야 모두가 안다. 달리기 경주에서 느리지만 성실한 거북이 빠르지만 게으른 토끼를 이겼다는 이솝 우화 아닌가. 결말을 이렇게 알고 있다면, 당신은 쉰 세대이다.
1990년대 이후 초등학교를 다닌 세대는 결말을 제각각 기억한다. 그럴 것이 교과서가 “토끼는 깡총깡총 뛰어갑니다. 거북이는 엉금엉금 기어갑니다”로 끝을 맺는다. 경주 결과가 없다. 당연히 산 정상에 태극기를 꽂는 거북의 그림도 없다. 다만 질문이 이어질 뿐이다. “누가 이겼을까? 왜 그렇게 생각하나?”
우화라지만, 초등학생의 감수성으로서는 느림보 거북의 승리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첫째, 불평등이다. 뭍에 사는 토끼와 물에 사는 거북을 억지로 경쟁시키고는 마치 평등한 경주인 것처럼 호도한다는 것이다. 생활여건과 신체조건이 다른데 “열심히 하면 돼”하는 식의 기득권 옹호 심리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셋째, 이기심이다. “내가 잘해서 경주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다. 상대의 허점을 찌르거나 방심을 이용해야 한다. 즉,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다.” 이런 함의에 초등학생들이 심리적으로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아마도 독재를 관통한 쉰 세대는 획일적인 교복에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갇혔다. 어차피 과정보다 결과 지상주의 아닌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하지 않던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다.
반면 민주화를 통과한 신세대는 몸도 마음도 해방됐다. 교복자율화는 사고의 다양성으로 이어졌다. 이제 계몽적인, 일방적인 결론이 더는 ‘쿨’하지 않다. “누가 이겼을까”하는 ‘열린 결말’은 자연스럽게 ‘열린 생각’을 일깨운 것이다.
인사청문회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세대 간 차이가 느껴진다. 쉰 세대는 위장전입에 민감하다. 종류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가 조합주택이나 청약저축을 통한 내 집 마련을 위한 것이다. 이건 이해해줘야 한다. 둘째가 농지나 임야를 매입하려는 경우이다. 바로 부동산 투기를 통해 자산을 늘리려는 것이다. 이해해주기 어렵다. 셋째가 자녀의 진학 문제이다. 좋은 학군에 배치 받기 위한 것은 양심불량, 이사나 전근 때문이라면 이해 가능이다.
그런데 위장전입의 수혜자는 쉰 세대의 자녀인 신세대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범죄가 아니기에, 또 앞으로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기에 관대한 편이다. 달리 보면 자격보다 능력을 중시한다고 할까.
쉰 세대는 그래도 오늘을 지배한다. 신세대는 내일을 지배할 것이다. 문제는 ‘낀 세대’다. 돌로 보면 쉰 세대는 매끈한 곱돌, 신세대는 야무진 차돌, 낀 세대는 그저 만만한 짱돌이다.
어제의 신세대 386은 오늘 쉰 세대가 됐다. 그런데 58년 개띠는 그때 낀 세대였는데, 지금은 어느덧 ‘간 세대’다. 짱돌이 ‘간 돌’이 됐다. 상원의 개 팔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