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학의 ‘공부에 관한 공부’] 감각, 사고의 재료
2017-06-07 16:29
장 콕토(Jean Cocteau)의 작품 ‘미녀와 야수(La Belle et la Bête, 1945)’에 등장하는 야수는 교양 있고 무척이나 인간적이다. 하지만 이 야수는 매일 밤 밖에 나가 사냥을 해야만 했다. 사슴을 잡아 김이 올라오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수가 아닌 인간에게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또한 야수처럼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하는 행위가 아닐까?
단맛에 집착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어린이용 음료를 마셔본 적이 있는가? 실제로 그 맛은 시금털털하다. 아이들이 왜 이런 맛을 좋아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비밀은 그 신맛에 감춰져 있다. 원래 이 음료는 달아서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당분을 포함하고 있다. 이를 숨기기 위해 0.0008%만 들어 있어도 그 맛을 알아차리는 신맛을 넣어 위장한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엄청나게 달지만 신맛으로 위장된 음료에 중독된다.
성인이 되면 새로운 맛에 도전한다. 그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커피와 같은 쓴맛에 대한 도전이다. 커피는 쓴맛과 신맛 등이 결합한 오묘한 맛이다. 커피는 9세기경 에티오피아의 한 양치기 소년이 염소가 붉은 열매를 먹고 흥분해서 뛰노는 것을 보고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커피를 마셨지만, 당시에는 그냥 열매를 씹어 먹었다.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커피를 볶아 먹었고 진한 향이 깃든 기름을 짜내 씁쓸한 맛이 도는 지금의 커피를 탄생시켰다.
미각은 후각과 가장 밀접한 감각이다. 음식이 입에 가까워지면 그 음식의 냄새가 먼저 후각을 자극하고 미각을 준비시키며 또한 흥분시킨다. 이어 미각을 따라 촉각도 준비한다. 촉각은 음식의 질감이나 수분 등을 감지해 미각을 돕는다. 이렇게 감각은 서로 보완적이다.
촉각을 감지하는 피부는 세계 속에 놓인 나를 둘러싼 보호막이자 나의 규정된 테두리이다. 심지어는 맛을 보는 혀도 피부로 둘러싸여 있다. 촉각은 신체의 부위마다 다르게 느껴지는데, 입 주변과 같이 민감한 부위가 있는가 하면 등처럼 감각에 둔한 부위도 있다. 만약 등이 입처럼 예민했다면 누워서 자는 것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 됐을 것이다.
미각도 첫 감각과는 달리 두 번째, 세 번째 감각이 진행될수록 약화한다. 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그렇다. 왜 그럴까? 육체는 게을러서 새롭지 않은 감각에 더는 감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로움을 추구하는 뇌도 새롭지 않은 감각을 지속하는 것에 불만을 내뱉는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게을러진 감각은 뇌에 아무런 신호를 전달하지 못한다. 이것은 세계와의 단절이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세계 속에서 점차 내가 고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새로운 사고의 재료가 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로 통하는 창문이 서서히 닫히는 것이다.
“음악은 우리에게 그냥 듣는 것과 주의 깊게 듣는 것을 구분하도록 해준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