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학의 ‘공부에 관한 공부’] 훌륭한 공부의 조건, 감각
2017-03-09 13:51
우리는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이를 해석하면서 공부한다. 그리고 공부한 대로 행동한다. 이렇게 감각은 자신과 분리된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창이다. 감각 이외에 세계를 공부할 방법은 없다. 그런데 이 감각은 생존을 제일의 가치로 두는 육체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감각기관은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면 게을러지고 핑계를 만들기 좋아한다. 눈은 감기고 귀는 닫힌다.
그 감각기관이 담당하는 일이 외부 세계를 머릿속으로 받아들이는 일, 그러니까 배우는 일이다. 컴퓨터로 말한다면 마우스나 키보드, 센서가 하는 입력이다. 중요한 것은 입력이 출력의 질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감각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안 보이고, 안 들리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외부 세계로부터의 입력이 없는 상태가 된다. 이것은 뇌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입력이 없으면 인식이 없는 것이고, 인식할 뇌가 작동하지 못하면 출력은 더구나 불가능해진다. 이것을 의학적으로는 뇌사(腦死, Brain Death)라고 한다.
그렇다면 뇌사와 완전한 인식의 중간 단계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감각의 결과가 여기에 속한다. 예를 들어, 노화가 진행되면 감각 능력이 떨어진다. 잘 못 보고, 잘 못 듣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맛을 느끼려면 미각을 수용하는 미뢰(味蕾, Taste Bud)를 거쳐야 한다. 혀의 돌기인 미뢰는 말 그대로 ‘맛을 느끼는 봉우리’다. 이 미뢰가 성인은 1만개 정도 분포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그 수가 줄고 점점 퇴화한다. 노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나이 드신 어머니의 미각이 점점 떨어져 국이 짜게 되는 이유다. 감각이 죽음을 향하는 안타까운 이 현상을 되돌릴 방법은 아직 마땅치 않다.
인간의 감각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정확한 것이다. 그런 감각을 집중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제대로 입력할 수 없다. 책상 위의 클립 하나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면서 ‘클립이 도대체 어딜 간 거지?’하는 상황이 그것이다. 클립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닐 테고, 놓아둔 곳에 분명히 있는데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보지도 않으면서 없다’고 하는 것이다. 뇌가 감각기관에 제대로 명령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이런 경우다. 보고 있지만 보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매일 마주한다.
이런 사람을 관찰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한다.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안 본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본다’는 것은 의지를 갖고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찾는 행위인데, 찾으려는 의지가 사라진 상태에서 보이는 것만 인식한다면 ‘안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해서는 잘 공부할 수 없다. 그러니 잘 공부하려면 보이는 대로 보지 말고 목적을 갖고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한다. 감각이 주는 대로 인식하지 말고 뇌가 확실하게 감각을 지배해야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감각이 무뎌져 나이가 공부를 방해한다고 생각된다면 더 집중해서 감각을 움직여야 한다. 집중해서 세상을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 집중한다는 것은 세밀한 것의 변화도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부를 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을 천천히 보내는 일이다. 오히려 집중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서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지겠지만, 삶 전체로 보면 정반대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감각이 노화해 감각의 밀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젊을 때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 보이니 세상을 밀도 있게 지각한다. 그래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같은 시간에 노인보다 많은 수의 프레임이 지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감각이 떨어져서 시간이 흘러도 변화가 덜 느껴진다. 그러다가 갑자기 확 바뀐 변화가 인식된다. 그 변화가 시간이다. 그러니 시간이 빠르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더 정밀하게 세계를 들여다보고 공부하자.